2023년 다섯 번째 신입생을 맞이한 청강대 웹소설창작전공의 실기 입시 주제어는 국내 최초로 웹소설창작전공을 신설한 대학답게 매년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실기 고사는 정해진 시간에 제시된 주제어에 맞춰 스토리 시놉시스를 작성해야 하는 시험인 만큼 기본적인 장르에 대한 이해는 물론 웹소설 및 장르 소설 등을 다독하고 습작해온 내공이 중요하다. 이번 <CKMC TIP>에서는 2024학년도 웹소설창작전공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위해 2023학년도 실기 우수작을 공개한다. (오탈자는 편집자가 교정했습니다.)
2023 수시 2차 시험 주제어 : 50원 동전, 관제탑
네오 서울 대공항의 관제탑 앞에는 기묘한 자판기가 있다. 8세대 자율사고 인공지능을 탑재한 음료수 자판기는 자기 안에 들어있는 음료수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에게도 사소한 위협을 가할 수 있게 설계되었는데, 그런 덕분에 녀석은 대한민국이 핵미사일을 맞고 한 번 초토화된 후에도 사람 형상을 한 들개들에게 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멀쩡하게 보관된 마실 것을 잔뜩 들고 있을 확률이 높지만, 애석하게도 내 지갑에는 현금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이 불비와 독 구름에 무너진 것은 단 하루아침이었고, 카드는 즉시 휴지 조각이 되었다. 당연히 나는 계좌에서 한 푼도 꺼낼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계산이 버추얼 크레딧 거래와 카드 결제로 이루어지던 사회였으니, 수중에 얼마나 많은 현금을 들고 다녔겠는가. 나는 굶주린 채로 식음료를 찾아 거리를 떠돌아야 했다. 폭주족 들개단과 방사능에 절인 흡혈 고라니, 덤프트럭만 한 멧돼지를 피해 도착한 네오 서울 대공항은 이미 깔끔하고 더럽게 털린 후였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들린 무너진 관제탑 앞에서 나는 그 기묘한 자판기를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긴장감의 바다에 빠져 대치했다. 어느 쪽의 리볼버가 먼저 불을 뿜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녀석이 가진 전기충격 센트리건이면 다 죽어가는 나를 즉사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평범한 고객인 척하는 동안에는 괜찮으리라. 나는 동전을 꺼내 개수를 가늠했고, 합계는 800원이었다. 자판기가 파는 품목 중에 가장 저렴한 생수가 850원이었다. 목이 쉬지 않았다면 가장 끔찍한 욕을 내뱉으며 신음했을 것이다. 나는 자판기 앞에 엎어져서 노랗게 변한 하늘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처량하게 죽어갈 바에는 덤프트럭 멧돼지에게 치이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실시간으로 쓰라린 배를 부여잡고 뒹굴다가 말라 죽기에는 해보지 못 한 일이 너무 많았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벌써 죽고 없겠지. 만약 저 재수 없는 하늘 너머에 신이 실존한다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고자 한다면…… 불쌍한 어린 양에게 50원 동전 한 개만 내려줬으면 좋겠다. 나는 더 이상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흘리는 척하며 자판기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가동 중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뭐,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이 녀석은 의사를 표현할 수단이 없다. 센트리건은 예외로 치고 말이다. 잠시 후, 시끄러운 잡음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젠장! 서울 길거리를 지배하는 들개들이다! 나는 자판기의 옆구리에 딱 붙어서 숨을 죽였고, 자판기는 내 엄폐를 흔쾌하게 허락했다. 나는 마치 시체처럼 행동했다. 부단한 노력을 한 덕분인지 폭주족들은 나를 발견하지도 못한 채로 지나쳤다. 개조된 갖가지 탈것들이 정신없이 으르렁거리며 활주로를 달렸고, 이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녀석 중에 한 놈이 무언가 반짝이는 물건을 튕겨서 버리고 갔고, 나는 그것을 잽싸게 주웠다. 그것의 정체는 50원 동전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저 폭주족들이 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굉장히 기뻐하며 자판기 앞으로 다가갔다. 가진 동전을 모조리 집어넣고 버튼을 누르자, 덜컹 소리를 내며 생수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보존 상태가 좋았는지 물맛이 아주 좋았다. 수분 공급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나오던 눈물이 갑자기 핑 돌았다. 그렇게 질질 짜고 있으니, 자판기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잔뜩 들렸다. 녀석은 끊임없이 새 음료수 캔과 병을 배출했다. 내가 다 가져갈 수도 없는 양이었다. 오랜만에 현금을 투입받아서 오작동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자판기의 자율사고 인공지능이 사소한 위협 대신 사소한 배려를 베푼 것일까…. 내게는 물론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다. 나는 자판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챙길 수 있는 만큼 음료수를 챙겼다. 몸은 아주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전에 없이 가벼웠다.
심사평
❚ 1, 2차 심사를 진행하며 가장 많이 본 장르가 아포칼립스물이었다. 무너진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나 그 무너진 세계를 이용하는 인물, 또는 과거 희생된 이를 기억하는 인물 등 다채로운 변주를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이 특별했던 이유 첫 번째는, 장르 규칙을 충실히 지켰다는 것이다. 아포칼립스물에서 어떻게 세상이 멸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걸어가다 하늘에서 떨어진 피자를 맞고 전 인류가 멸망했어도 장르 팬들은 ‘하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할 것이다. 아마추어 작가 중엔 멸망 배경을 과하도록 디테일하게 그려 정작 장르의 재미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멸망 과정은 몇 단어로 깔끔하게 지나가고 그 이후의 삶에 오로지 집중한다. 두 번째, 이 작품만의 상상력이 웃음을 자아낸다. 폭주족 들개단, 흡혈고라니, 덤프트럭만 한 멧돼지. 인간보다 더 강력한 애니멀 몬스터를 창조했는데, 이는 영화 <매드맥스> 시리즈에서 모히칸 머리를 한 폭주족 약탈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 클리셰를 간단히 들개나 고라니 따위로 바꾸었을 뿐인데 새롭게 다가온다. 마지막 이유는, 희망과 불행이 교차하는 갖가지 모순으로 독자를 감정 이입하게 만든다. 자판기는 오아시스지만, 규칙을 어기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폭주족 들개단은 위험 요소지만, 주인공에게 50원 동전을 떨궈주고 간 은인이다. 알 수 없는 행운으로 많은 음료수를 챙겼지만, 관제탑을 벗어나는 즉시 멧돼지를 만나 치어 죽을 수도 있고, 약탈자에게 음료를 모조리 뺏길 수도 있다. 웹소설은 독자의 감정이입과 대리만족이 무척이나 중요한 매체이다. 이 작품은 다채로운 모순으로 독자를 끌어당기고, 어느 순간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주인공도, 재밌는 작품을 써준 학생도 거친 세상에서 멋지게 살아남아 주길 바란다. (웹소설창작전공 P교수)
정리 박세림(웹소설창작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