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KMC_CRITIC] 90년대 만화를 좋아하세요? 그렇다면 좀 센 걸 가져왔습니다 – 만화 「불의 검」

글 : 박세림(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웹소설창작전공 교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만화잡지를 사 모았다. 『댕기』, 『윙크』, 『나나』, 『화이트』, 『나인』 등 순정만화 잡지부터,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 같은 소년만화 잡지는 물론 10대 중반부터는 『만화무크지 믹스』를 비롯한 독립만화도 몰입했다(안타깝게도 『보물섬』과 『르네상스』 세대는 아니다. 더 빨리 태어날걸). 그러면서 드라마 <엑스파일>과 영화 잡지 『KINO』를 끼고 살았다(『KINO』는 있어 보이고 싶은 시네필의 필수 소지품이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보고 읽어댄 꼬마는 현재 ‘맛있는 건 뭐든 다 주워 먹는’ 잡덕 어른이 되었다.
용돈은 넉넉하지 않았다. 엄마가 용돈으로 가끔 100원, 많게는 500원을 주면 옷장 밑에 모아놓고, 잡지 발행일이 되면 빗자루로 그걸 모조리 쓸어 모아 서점으로 향했다. 그렇다. 나는 평범한 꼬마 오타쿠였다.
그 꼬마가 처음으로 산 만화는 격주간 순정만화 잡지 『댕기』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주차에 첫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 바로 「불의 검」이었다.
1992년에 시작해 연중과 폐간을 반복하다 2004년 완결까지
혹자는 이 만화에 ‘연중신’이 내렸다고 한다. 1992년 『댕기』에서 연재를 시작했지만 잡지가 폐간되었고, 2000년부터 『화이트』에서 이어서 연재했다. 그나마도 2001년에 화이트가 폐간되고 오랜 시간 강제 휴간 상태를 보냈다. 그러다 「불의 검」 단행본 11권부터 웹진 『위식스』에 연재해, 2004년 12권으로 이 대서사시는 완결되었다. 1990년대는 만화잡지의 시대였다. 특히 만화 주간지 『아이큐점프』는 매번 매진됐을 뿐 아니라, 최고 판매 부수 60만 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화려한 시절 이야기는 소주와 눈물 없인 나눌 수 없으니 여기서 그만 하겠다.
사실 「불의 검」은 어린아이가 볼만한 만화가 전혀 아니다. 폭력, 납치혼, 강간, 성매매, 노예제 등이 가감 없이 등장한다. 노골적인 베드신은 없으나, 상황 자체가 끔찍해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다면 추천하기 어렵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은 아직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되기 전이었고 당시는 <애마 부인> 부류의 성인영화가 예술영화로 분류되기도 했으니, 나에겐 행운이었다. (물론 청보법이 시작된 후에도 청소년관람불가 작품이나 잡지는 어떻게든 보았다. 궁핍한 인간은 스스로 우물을 파기 마련이다)
위에 말한 ‘납치혼, 강간’ 등의 키워드 때문에 이 만화에 대해 크게 오해할 수 있겠다.

아닙니다. 이 작품은 격정의 시대를 헤쳐 나간 한 여성의 위대한 대서사시이자, 역사 로맨스이자, 당신의 인생을 뒤바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중요하니까 존댓말로 했다. 왜냐면 이 만화는 내 인생을 좀 더 좋은 쪽으로 가게 해줬고, 내게 있어 캐릭터 교과서니까.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궁금할 수도 있을 당신에게 내용을 짧게 설명해 주겠다. 일단 이 이야기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던 시기의 동북아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줄거리 소개
예맥 계열의 청동기 부족 아무르 족은 광포한 철기 부족 카르마키에 의해 북방 초원을 뺏기고 먼 북쪽 땅으로 쫓겨난다. 아무르의 대전사 가라한 아사는 카르마키의 철기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잠입했다가 큰 공격을 받는다. 의식을 잃은 채 실카강(江)을 떠내려가다 강가 산골에 사는 아무르 족 여자에게 구조되는데, 대장장이 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 여자는 이름이 없다. 그저 ‘얘야’, ‘아가’라고 불릴 뿐.
이름이 없는 여자와 이름을 잃은 남자는 곧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라’와 ‘산마로’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둘만의 혼약을 맺는다.
행복도 잠시. 산마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산골까지 들어온 카르마키 사냥꾼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라를 납치한다. 카르마키 족은 여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악습을 가졌고, 와중에 아무르 족 여자라면 ‘피부가 희고 부드러워’ 사족을 못 쓴다.
산마로는 아라를 구하기 위해 카르마키 수도로 향하다 카르마키의 샤먼이자 여신이라 불리는 ‘카라’의 주술 공격을 받는다. 이때 그는 본래 기억을 되찾고 아라와의 기억은 모조리 잊고 만다.
같은 시간. 아라는 카르마키의 대장장이이자 샤먼 카라의 수하 ‘수하이 바토르’에게 넘겨진다. 괴로운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아라는 대장장이 아버지와 산마로를 떠올리며 망치를 집어 든다. 아라는 자신에게 폭력적인 애정을 퍼붓는 수하이에게 철기 비법을 전수 받고, 드디어 철검 ‘불의 검’을 완성한다.
결혼을 진행하는 수하이에게서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아라는 결국 아무르 족이 숨어 사는 북쪽 땅에 도착해 산마로를 만나지만, 그의 기억엔 이미 아라가 없다. 그는 대전사 가라한이며, 아라의 신분으로는 꿈도 못 꿀 전사 가문의 수장이다.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지만 그건 사상일 뿐. 아무르 족 사람들은 적국의 아이를 밴 환향녀 아라를 멸시에 찬 시선으로 본다. 아라는 혼을 담아 만든 철검 ‘불의 검’을 가라한 아사에게 바치고, 여자 야장(대장장이)이자 미혼모로서 살아가기를 택한다. 아무르 족은 아라가 만든 철검 덕분에 점점 강해지고 가라한은 그 철검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해간다.
적국의 아이를 밴 여자이자 철검을 만드는 야장 아라에게 자꾸만 눈이 가는 가라한. 아라와 가라한을 동시에 사랑하는 시인이자 노래꾼 바리(현대로 치면 젠더퀴어·팬섹슈얼·올라운더 엔터테이너). 아무르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샤먼인 ‘소서노’, 가라한의 충성을 믿으면서도 그 능력을 경계하는 왕 ‘마리한’, 그리고 남성을 멸시하고 여성만의 세상을 꿈꾸는 카르마키의 샤먼 ‘카라’와 그의 수하이자 폭력의 대물림을 상징하는 ‘수하이’.

이 이야기는 아라와 가라한(산마로)의 절절한 사랑을 중심으로,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과 얽히고설킨 정치적·정서적 이해관계, 그리고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주요 인물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이겨내거나 버텨내거나 파괴해 가는지 보여준다.
김혜린 작가님 작품 중 얼마 없는 해피엔딩이다. 안심하고 보셔도 좋다.
매분 매시 인류애가 바사삭 무너지는 당신. 그렇다면 여기.
청동기 동북아시아 부족 간 전쟁이라는 낯선 배경,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와 그 칼로 싸우는 전사의 사랑 이야기라는 다소 오래되어 보이는 소재, 여자와 천한 신분을 인간 이하로 보는 진절머리 나는 설정 등은 분명 취향을 탈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작품을 소개하고 감히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
가장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인간을 품고, 몇 번이고 배신당했어도 다시 한번 인간을 선택하고, 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어져도 결국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그 선택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혹여 있다 해도 인간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이 이야기는 말하기 때문이다.
늘 작가님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면, 이토록 사람을 어여뻐 하고 불쌍히 여길까. 그러면서도 인간의 악의 악까지 파고들고 그걸 끄집어내 결국은 토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어떻게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90년대 만화를 좋아하나요? 출판만화를 좋아하나요?
어떤 작가는 태생부터 감수성이 예민하고 풍부해 인간을 저절로 깨우친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반대다. 인간을 몰라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책으로 공부했다. 인간은 어떤 때 행복하고, 어떤 때 불행을 감추는지, 어느 때에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그러다 좌절하면 어떻게 일어서는지 따위를 말이다. 지금도 너무 몰라 다시 책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 만약 어린 시절 「불의 검」을 몰랐다면? 나는 책으로도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아마 인간을 이해할 시도도 안 했을지 모른다(사실 인간보다는 고양이와 개가 좋다. 모든 포유류는 사랑스럽지만 인간은 좀…… 아니지 않은가. 일단 환경에 유해하다).
90년대 만화를 좋아하시나요? 출판만화를 좋아하시나요? 그렇다면 「불의 검」을 보셔야겠습니다. 악이 판치는 작금이 통탄스럽다면, 당신이 혼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인류애가 와르르 무너졌다면 더더욱.
P.S. 글의 시작을 ‘초등학교’라 썼는데 사실 나는 국민학교 마지막 세대다. 한글 프로그램이 국민학교를 오타로 인식해 초등학교로 자동 수정했고, 나는 그걸 말리지 않았다. 아무리 내 심장이 자본주의와 비도덕에 찌들었다지만, 한 가닥 남은 양심의 강요로 고백한다. 네, 꼬마 오타쿠는 이제 낡고 지친 오타쿠가 되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