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KMC CRITIC]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투영할까 – 현대 판타지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글 : 양혜림(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눈 떠보니 낯선 천장이라면 다른 세상인 게 국룰 아닌가?

2021년 1월에 연재를 시작한 웹소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의 첫 문장입니다. 작가는 이 한 문장으로 이 소설의 세계관이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세계’임을 선포하고 시작합니다. 회귀도 빙의도 이세계 차원이동도 모두 가능한, 2021년 웹소설 시장의 코드화된 세계지요. 당장 다음 페이지에서는 이 중에서 이 작품이 선택한 코드가 어떤 것인지를 밝힙니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는 우당탕 넘어졌다. “으윽! ……X.”

자신이 모르는 몸에 빙의되었음을 알고 애써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던 주인공은 곧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 3년 전 달력이다.

다른 몸에 빙의한 채 과거로 돌아왔군요. 다시 혼란스러워하던 주인공은 이 시점에 재미있는 시도를 합니다.

나는 얼빠진 말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상태창?”

자기 자신도 미친 생각이라 여기며 그냥 한 번 중얼거려봤을 뿐이지만, 놀랍게도 그 말에 반응해서 눈앞에 정말로 상태창이 뜹니다. 그리고 이 상태창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의 미션을 알게 됩니다. 눈앞에 이런 상태이상 메시지가 떠 있거든요.

정해진 기간 내로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할 시, 사망. 남은 기간 : D-365

이렇게 해서 평범한 공시생이던 주인공이 생전 모르는 남의 몸에 들어와 K-pop 아이돌에 도전하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1화이자 메인 플롯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르(이 작품의 장르는 현대 판타지입니다)의 약속에 익숙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리얼리티에 기반한 개연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소위 ‘순문학’만을 섭렵해 온 독자라면 당장 이 소설의 첫 문장부터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소름끼치는 리얼리티’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남의 몸에 빙의한 채 3년 전으로 돌아왔더니 상태창이 보이는 이야기’가 현실 재현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된다는 사실은 얼핏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요.

자, 독자들의 반향이 컸던 24화의 한 장면을 보겠습니다.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전해 훌륭하게 무대를 완수한 주인공은 모니터링을 위해 SNS에 본인의 이름 ‘문대’를 검색해 봅니다. 온갖 칭찬과 호의적인 합성 사진 등이 쏟아져 나오지만 주인공은 이것이 인터넷 여론의 전부가 아닐 것이라며 잠시 고민한 후 ‘곰머’를 검색합니다. ‘문’을 뒤집고 ‘대’를 유사 표기법을 바꾼 변형입니다. 주인공의 추측은 맞아떨어져, ‘곰머’에 대한 성희롱과 악성 글 등 좀 더 적나라한 게시물이 줄지어 출력되지요.

이 장면에 대한 베스트댓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아니 써방까지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내 아이돌이 제일 몰랐으면 하는 것중 하난데요 ㅠㅠ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울다가 웃다가 하시는군요. 써방은 써치 방지, 즉 특정 키워드를 검색했을 때 본인의 글이 잡혀 나오지 않도록 해당 키워드를 변형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정 개인(주로 아이돌)에 대해 적나라한 의견을 남기고 싶지만 다른 팬과 충돌하는 것은 원하지 않을 때 주로 쓰지요. 더욱이 아이돌 본인이 해당 써방 용어를 알고 일부러 찾아보는 것은 작성자에게 있어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일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작가는 찐이다’를 외치게 한 장면이었죠.

이 작품 최대의 강점은 잘 만들어진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 그리고 지금 바로 SNS나 커뮤니티를 검색하면 금방 쏟아져 나올 듯 현실감 넘치는 아이돌 팬들의 리액션 재현입니다. 생생하게 묘사된 커뮤니티에서의 공방(소위 키배, 키워드 배틀)은 종종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서술 수단으로 기능할 만큼 이 작품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주인공이 공식 SNS에 사진을 업데이트하는 정도의 작은 사건이라도, 그 사진에 달리는 팬들의 댓글을 매우 리얼하며 맛깔나게 묘사하기 때문에 독자는 저절로 흐뭇한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러한 장면을 스스로 현실에 구현하기 시작하지요.

무슨 이야기냐고요? 독자들은 주인공이 속한 아이돌 그룹 ‘테스타’의 가상의 카톡 대화와 가상의 팬덤 커뮤니티 대화 로그를 만들어 SNS에 올립니다. 작품 내에 언급되었던 공연의 직캠을, 앨범 재킷을, 포토카드를, 프로필 사진을, 인터뷰 기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2차 창작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SNS를 운영하는) 현실세계의 웹소설 팬덤이 (SNS를 운영하는) 작품세계 내의 아이돌 팬덤으로 완벽하게 치환될 수 있는 구도이기 때문에 독자의 몰입이 한층 강화됩니다.

작품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적어도 현실의 물리법칙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본적인 물리법칙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세계관과 메인플롯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얼마든지 그 세계를 ‘지금 여기, 독자의 현실 세계에’ 덮어씌울 수 있습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은 그 좋은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데못죽』 웹소설 팬덤의 슬로건을 소리 높여 외치며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테스타는 실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