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력의 끝을 추구하는 고고한 작가의 삶과 만화 ,<고고한 사람(孤高の人)> 사카모토 신이치(坂本眞一)
<고고한 사람> 표지 <고고한 사람> 표지
글 : 양세준 (웹툰만화콘텐츠전공 교수, 만화가)
산 좋아하시나요? 우리나라만큼 큰 도시 가까이 오르기 좋은 높이의 산이 있는 나라도 드물다고 하던데요. 그래서인지 등산 동호회도 많고 어디를 가도 등산복을 입은 분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건 참 건강한 취미생활입니다만, 가끔은 눈치 없이 주위에 자신의 취미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주말에 부장님과 함께 하는 등산”은 힘든 사회생활을 대표하는 웃지 못할 밈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만화는 그런 분들께 꼭 추천해드리고 싶은 만화입니다. 가슴속 깊이 ‘입산 금지’라는 네 글자를 새기게 해주는 만화거든요.
<고고한 사람(孤高の人)>은 산과 클라이밍을 소재로 한 만화입니다. 원작은 1969년 출간된 닛타 지로(新田次郞)의 소설로 실존 인물인 등반가 카토 분타로(加藤文太郎,1905~1936)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만화판 <고고한 사람>은 나베타 요시오(鍋田吉郎)와 타카노 히로시(高野洋)가 초반부를 각색하고 이후로는 작화를 맡은 사카모토 신이치(坂本眞一)가 직접 이야기를 이끌어갔습니다.
펜선 하나하나에 필력과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밀도 높은 작화와 주인공 모리 분타로(카토 분타로)의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산이 이렇게 무섭습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만화이기도 합니다. 일단 산에서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처음엔 아무 정보 없이 작품을 접해서 소극적인 성격의 소년이 클라이밍을 통해 알에서 깨어나 성장하는 전형적인 학원 스포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도입부의 내용은 내성적인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로 입부한 클라이밍 부에서 좋은 스승과 동료들을 만나 티격태격 훈련하고 대회에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작품 후반부보다 비교적 분위기가 가벼운 초반부에선 주인공 모리의 인간관계나 행동반경도 학교와 클라이밍 부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클라이밍이라는 소재 외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성장 드라마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설산에서의 첫 조난과 자신을 구하려던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그렇지 않아도 사회성이 부족했던 모리는 이전보다 더 자기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점차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맞춰 사카모토 신이치의 그림에도 점차 디테일과 무게감이 더해져서 작품의 후반부에는 숨이 막힐 수준의 사실적인 묘사가 이어집니다. 효과음의 사용 없이 그림만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인물의 극단적인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작가의 표현력 앞에 독자는 K2 동벽을 마주한 등반가처럼 압도적인 몰입감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고교 졸업 후에도 모리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유일한 탈출구인 산행만을 목표로 돈을 모으며 폐쇄적으로 살아갑니다. 잠시 마음의 문을 열었던 사람들에게 사기나 도둑질을 당하며 끊임없이 사람에게 상처받은 그는 사회와의 단절을 택하고 혼자서 산을 오릅니다. 단독행이라 불리며 홀로 등정을 이어오던 모리에게도 벚꽃과 함께 사랑이 찾아오고 두 사람은 가정을 이룹니다. 여전히 완전한 고독과 고립을 원해 스스로 눈 덮인 산을 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내와 딸이 있는 집으로 간절히 살아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회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엔 사람을 통해 치유 받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존 인물인 카토 분타로는 야리가타케 북쪽 능선에서 조난을 당해 사망했고 소설은 실화를 그대로 따르지만 배경이 현대로 바뀐 만화에서는 이와는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작가의 완결 후기를 보면 연재 중에 일어난 토호쿠 대지진이 이야기의 결말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에 몰입해서 주인공 모리 분타로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갔다 나오고 나면 나는 그가 아님에 감사하게 됩니다. 뇌에 공급되는 산소가 모자라 지금 내 살갗에 닿는 감각이 추위인지 더위인지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의 극한의 환경에서만 숨통이 트이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단독행의 마음 같은 건 격렬하게 모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작가가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묘사해 놓은 나머지 그 외로움에 절절히 공감하게 되는 마력이 있는 작품입니다.
산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사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게으른 성격 탓에 산행은 예전부터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하는 불호의 영역이었지만 이 만화를 보고 더 싫어졌습니다. 물론 저에게 산행을 권했던 분들이 저더러 K2에 등반하자는 건 아니지만요. 일단 전 건강을 위해 안전한 평지에서라도 지금보다 많이 걸어야겠습니다.

<고고한 사람>은 슈에이샤(集英社주)의 만화 잡지 ‘주간 영점프’에 연재되어 전 17권으로 완결되었으며 국내에도 대원을 통해 전권이 정식 발매되어 전자책으로도 서비스되고 있습니다. 뛰어난 작품성으로 2010년 제14회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에서 만화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작가인 사카모토 신이치는 다음 작품인 <이노센트>에서도 프랑스 혁명기의 처형인 샤를 앙리 상송의 삶을 그리며 전작과 마찬가지로 실존했던 인물의 삶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각색하여 표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발 디딘 시대는 다르지만 여전히 그가 그리는 것은 사회의 기대에서 벗어나 자기 안으로 끊임없이 파고드는 지독히도 외롭고 고고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표현의 극의를 찾아 집요하게 펜선을 긋는 어느 고고한 작가의 삶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