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빛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 깊은 곳,
그리고 키도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아주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아주 비합리적인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는 도대체 이런 결심을 왜 하게 되었을까요?
호모픽투스, 허구를 만드는 인류
사피엔스와 창작 본능
도대체 인류는 언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일까, 사실 이런 인류학스러운 이야기는 관련 전문가가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에게 ‘이야기 본능’이란 것이 잠재되어 있다는 말은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니, 이 글에서도 딱 그 정도의 이야기까지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엄청나게 유명해서 다들 한 번쯤은 읽어보거나 들어보셨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를 인용해서 스타트를 끊어보고자 합니다.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2백만 년 전부터 지구에는 다양한 호모 속의 인류들이 동시에 살았다고 합다. 사피엔스니 네안데르탈인이니 하는 이름을 가진 인류들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피는 좀 섞였을지는 몰라도, 사피엔스 종만 남은 상태입니다.
이 멸종의 원인은 약 7만년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대체 7만년 전 인류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유발 하라리는 이를 ‘인지혁명’이라고 말합니다. 인지혁명이란 그 시기쯤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이라고 하죠. 이게 하필 당시 존재했던 다양한 호모 속 인류 중에서도, 사피엔스 종한테 일어난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 같은 경우에는 신체적 조건도 더 좋았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혁명이 일어난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인지혁명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허구를 창작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허구를 창작하는 능력이, 다른 인류의 멸종을 가져오고, 사피엔스만이 살아남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허구를 창작한다는 게 뭐길래, 다른 인류에겐 유해한 결과를 가져온 것일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허구란 무엇일까요?
허구란, 인간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들을 그럴 듯한 설정과, 그럴 듯한 인과관계로 묶어서 그럴싸하게, 믿을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허구를 창작하는 능력으로 사피엔스에게는 ‘공통의 신화’가 만들어집니다.
사람이 아무리 친밀감과 사적 대화를 통해 네트워크를 만들고 조직을 만든다고 해도, 그런 걸로 관리할 수 있는 조직 크기의 임계치는 150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이상으로 숫자가 늘어나면 서로가 서로를 다 알 수도 없게 되고, 친밀감도, 사적 대화도 통하지 않게 되죠. 이런 큰 조직은 전혀 다른 시스템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통의 신화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은 하나의 공통의 신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왕권신수설에 대한 것이든, 그 나라의 국교에 대한 것이든, 건국신화든, 아니면 민족에 대한 선민의식 같은 것이든, 뭔가 하나 이상은 있죠.
종교적인 것 뿐만이 아닙니다. 물질적 실체가 없는 어떤 개념이나 관념이 합의될 수 있는 것도, 사피엔스의 이런 능력에 기반됩니다. 법과 정의와 인권에 대한 믿음, 제도에 대한 믿음, 이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이죠. 그러고보니 어떤 대기업들은 그 똑똑한 신입사원들 모아놓고 창업주 자서전도 읽게 하고 시험도 치게 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건 회사의 창업주나 창업 모토에 대한 공통 신화를 만드려는 조직 관리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과 합의로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집단적 허구를 공유함으로서 사피엔스는 다른 호모 속보다 훨씬 큰 조직을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다른 호모 속들이 굳이 멸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렇게 조직이 커진 사피엔스는, 기껏해야 150명 정도 모여 있던 다른 호모 속들을 일부 흡수하거나, 인종 청소를 하거나 했을 것입니다. 자원도 부족한 판국에, 신화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인류는 철저히 타자화되어 그저 손쉬운 청소대상일 뿐이었겠지요.
이제 호모 속중에서 지구에 유일하게 남은 사피엔스 종은,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바탕으로, 아마도 다른 종을 모두 살해하고, 거대한 조직과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선조고, 우리는 그런 자들의 후손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겐 허구를 창작하는 능력, 즉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구를 창작한다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럴싸하게, 마치 필연적인 일처럼,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또한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 작법의 변치 않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허구를 창작하는 능력으로 모두를 멸종시키고 살아남은 유일한 인류, 그것이 저나 여러분과 같은 우리 현생인류의 초기 설정값이란 것이지요.
좀 더 나아가자면, 어쩌면 타자에 대한 폭력적인 면도 본능에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제가 호러물에 대해서 썰 풀기(?)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것에 대해서는 공포장르 할 때 따로 언급하겠습니다.
구석기 시대
인류에게 허구를 창조하는 본능이 있었다는 방증은 여러가지입니다.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죠. 이 시대에 모두가 다 아는 예가 있습니다. 이 글의 주제인 이야기 본능 말고도, 언어나, 종교나, 회화나,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나, 많은 학문이나 예술들이 자기네들의 ‘기원’이라고 하면서, 예를 들자면 챕터 1의 첫째 장부터 다 같은 예시를 들곤 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알타미라 동굴벽화, 라스코 동굴벽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스코 동굴벽화가 길게 잡으면 15000년 전쯤에 그려졌다고 하고,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길게 잡으면 18,500년 전쯤에 그려졌다고 합니다. 후기 구석기 시대죠. 인지혁명이 7만년전이니까, 이건 그 후로 5-6만년은 더 지나서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벽화를 보면 잘 그린 건 둘째치고,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벽화는 생활공간에서 발견된 게 아니라, 시커먼 동굴의 아주 깊숙한 곳에 발견되죠. 어떤 경우는 키에 닿지도 않을 정도로, 높은 천정에 잔뜩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15000년 전, 구석기 시대의 사람이라고 상상해봅시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혼혈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아직 문자도 없는 시대에, 동료들과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던 여러분이 어느 날, 빛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 깊은 곳, 그리고 키도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아주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는다는 겁니다.
그 깊은 동굴로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오기 위해선 횃불이나 등불 관리를 잘해야 했고, 그 안에서 받침대도 설치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림을 잘 그릴 때까지 오래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구석기인인 여러분은 아마 수렵 채집 생활이 매우 어려워 배부르게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겁니다. 정말이지 이런 활동은 시간만 낭비하는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먹고 사는데 아무런 실용성이 없습니다. 합리적이지 않은 활동입니다. 그 시간에 사냥연습 한 번 더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힘든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로 마음먹게 된 걸까요? 보통 학교에서 배우는 바로는 사냥을 좀 더 잘 하고 싶어서 주술적 의도로 그렸다고 들으셨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들으면 전혀 위화감이 없습니다. 그냥 순순히 이해가 됩니다. ‘뭐라고? 주술적 의도로 그림을 그린다고? 그림을 그려놓고 창으로 찌르면 사냥을 잘 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고?’ 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예컨대 누가 미우면 그 사람과 닮은 저주 인형을 만들어놓고 찌른다거나, 사냥을 잘하고 싶으면 닮은 짐승을 그려놓고 창으로 찌르면서 주술 행위를 한다, 같은 걸 우리 사피엔스들은 ‘그럴 듯 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건 참 신기한 것입니다. 아니, 그림을 찌르는데 멀리 있던 동물이 왜 약해져? 이런 주술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 닮은 모양끼리 인과관계를 갖고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걸 그럴싸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현실은 밝고 잠을 잘 때는 어둡죠. 그렇다면 현실에 존재하지만 마치 잠 속처럼 어두운 동굴은 꿈이나 죽음 등의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중간 통로라고 여겼다는 것도 그럴싸하게 느껴지죠. 또 동굴과 같이 두 세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그런 곳에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특정한 제식을 상상해내는 방식이나, 바른 규칙을 가지고 마법을 걸면 걸릴 것이라는 믿음이나, 이런 모든 허구의 개념을 그럴싸하게 느끼는 것, 그게 바로 사피엔스의 특징입니다.
요약하면 구석기인들에게는 ‘주술이 통하는 세계관’ 이 생긴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지와 미지의 빈틈을 허구로 채운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죠.
주술이라는 창조된 허구의 개념을 실제로 믿고 시간과 공을 잔뜩 들이는 것이, 이성적으로 사냥 연습하는 것만큼 중요해진 겁니다. 이제 인간은 한 발은 허구성, 다른 한 발은 현실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 양 발을 번갈아가며 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허구와 현실, 이는 인류에게서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인 호모픽투스입니다. 조너선 갓셜이 쓴 ‘스토리텔링 인간’이란 책에, ‘호모픽투스’라고 해서, 픽션을 만들고 향유하는 인간에 대해 정의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전 고인류학 같은 데서 합의된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에렉투스’ 같은 학명 말고, 사회문화이론가들이 선언하는 호모픽투스니 호모노마드니 호모 데이터쿠스 같은 단어를 뒤질세라 경쟁적으로 배우고, 대중을 한방에 다 꿰뚫는 통찰이라도 되는 양 강연하러 다니는 현상은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물론 새로운 정의는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유행어가 되는 것이 좀 꺼려집니다. 왜냐면 예를 들어 호모 픽투스 같은 용어를 잘 만들어놓고는 기껏해야 “기업인이나 공무원들도 이걸 받아들여 스토리텔링적으로 조직 문화를 개선해라.”거나, “스토리텔링적으로 영업을 해라.”, “스토리로 감동시켜라”, 같은 이야기로 흐르곤 하는 것이 좀 시시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인류에게 있다는 허구를 창작하는 능력, 즉, 이야기를 만드는 본능이 있다는 것은사피엔스만 살아남았다거나, 동굴벽화 말고도 수없이 많은 방증이 있습니다.
신화와 전설, 민담, 종교가 그 예이지요. 다만 종교적 행위 자체는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료를 매장하고 장례를 치러줬을 거라고 하죠. 정말이라면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상징, 공감, 추모 등의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추상적 사고가 사피엔스와 같은 정교한 스토리 짜기 능력으로 발전하지는 못했거나, 했더라도 너무 늦었나 봅니다.
여하튼 전 세계에 살아남은 현생인류들에게 신화, 전설, 민담, 종교 하나 없는 경우가 없습니다. 아무리 고립되어 원시적으로 사는 부족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도 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공통으로 믿는 이야기를 아예 안 만드는 인간 사회는 없다는 것이요. 우린 새로운 나라, 새로운 부족을 발견하면 거기 신화는 뭘까, 걔네들을 뭘 믿을까, 걔네들은 어떤 민담이 있고 설화가 있을까, 그런 걸 궁금해 합니다. ‘고대부터 전해진 어떤 공통의 허구가 있을 것’을 당연하게 가정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주 합리적인 외계인이 있다면 걔네들도 그런 게 있을까요? 고대로부터 전해진, 공통으로 믿는 허구, 신화, 행동이나 윤리 강령, 뭐 그런 게 있을까요?
고대를 거쳐 중세
이제 시간이 흘러, 고대의 인류는 이 능력을 가지고 점점 역사를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일단 고대나 중세란 말을 편하게 쓰려고 유럽을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고대인들은 다들 아시다시피 어딜 가나 그냥 제사 지내고, 점 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인이 아무리 대단했어도, 어쩔 수 없는 고대인스러운 부분이 있죠. 그러다 중세에 들어서서 유럽은 그리스도교라는 거대한 세계관으로 통일됩니다.
물론 이 통일이라고 해서 모든 지역마다 교리나 신학이 완벽하게 합의되었다기 보다,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공유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전통 그리스도교에서 구마의식이라던가, 성찬제라던가 하는 의식들은 어떤 점에서 신비적이고 마법적인 부분들이 다분합니다. 그리스도교 스스로는 ‘미신을 거부한다’고 하지만, 잡신의 권능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강한 것 같고, 의식들은 상당히 오컬트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신비적인 부분들이 현실의 빈틈을 허구로 메우려는 본능을 가진 인류에게 꽤 잘 먹혔습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인은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스도교와 함께 갈 수 있었던 거겠죠.
근대
그렇게 중세를 지났는데, 과학이란 게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이 이단적인 신학문은 그간 인류가 공유해 왔던 허구의 세계관을 내쫓기 시작합니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더라, 우주가 무한할 수도 있다더라, 같은 건 그간 인류가 가져온 모든 세계관이 그냥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크게 세가지 타입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와장창 무너진 사람들끼리 새로운 시대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버티려고 하는 파, 기존의 것을 다 때려 엎고 새 시대의 카펫을 깔려는 파, 마지막에는 잘 모르겠으니 이긴 쪽을 따라가겠다는 파.
그러나 결국엔 새로운 시대는 다가오게 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때려 엎으려는 파는 점점 강해졌죠. 중세의 교부 및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염증까지 결합해서인지, 아예 극단적으로 인류의 모든 허구적 습성, 어두운 곳에 도사리고 있던 미신적 세계관을 모두 내쫓아서 과학과 이성의 빛으로 밝혀야 한다는 극단적인 가치관이 부상합니다.
그것이 바로 근대 이성의 시대, 계몽주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도 허구를 창조하는 능력,이야기란 것이 힘이 있을까요?
근대 추리문학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끝에, 이 영향을 받은 장르가 부상합니다. 바로 추리문학이었죠. 계몽주의의 긴 꼬리라고나 할까요? 그 유명한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가 19세기 말에 등장한 것입니다.
셜록 홈즈 자체의 인물상이 이렇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엄한 이성에 기대어, 냉철한 추리와 과학적 관찰로서 어두운 미스터리를 밝히는 인물입니다.
중세의 영웅은 자기 이름조차 못 쓰는 문맹이긴 해도 검으로 드래곤을 물리치는, 이른바 ‘신성’이라는 필살기를 가졌죠. 반면 계몽주의 이후의 영웅의 필살기는 ‘이성’입니다. 셜록 홈즈라는 영웅적 인물이, 혼자서 전부 알아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준다는 추리물의 스타일도, 뭔가 ‘계몽적’인 느낌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 푸아로가 모두를 모아놓고 풀이하고 요점 정리 해주는, 푸아로 피날레 같은 것도 떠오릅니다.
근대 환상문학
한편, 근대에 탄생한 문학에는 환상문학이란 것도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아리송하고 애매하고 불안하고, 이걸 믿을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 이야기들을 말하죠. [검은 고양이]를 쓴 에드거 알렌 포를 비롯해서, [드라큘라]를 쓴 브램 스토커니, 오스카 와일드니, 심지어 셜록 홈즈를 쓴 아서 코난 도일이니, 카프카 등등, 근대의 환상 문학에는 화려한 거장들이 많습니다. 어째서 추리문학과 환상문학이 등장한 시기가 겹치는 걸까요?
먼저 고백부터 하자면, ‘이성을 찬미하던 이 계몽주의 시대’ 때 언뜻 보기엔 안 어울리는 환상문학이 왜 등장했는지 말씀드리기 위해, 이 글 처음에 7만년 전씩이나 거슬러 올라가서 ‘인지혁명’ 밑밥을 깔았던 것입니다.
인류는 길고 긴 시간, 불합리함을 지속시킨 원인이었던 허구적 세계관에 대한 반동으로, ‘계몽주의’를 주창하게 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가, 본능적으로 허구를 완전히 떨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사피엔스의 뇌라는 게, 한 발은 허구에 담그고 있으니까요. 또다시 이렇게 지나치게 이성만 강조하는 계몽주의 재반동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다 파악되지 못하는 빈틈을 여전히 다른 허구로 메우려고 하는 겁니다. 환상문학은 그런 땅에서 꽃 피웠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성을 강조한다는 추리문학이란 것도 사실 기묘한 것입니다.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것이죠. 허구적 세계관을 경멸하고 이성적 세계관이 떠오르니까, 이성을 찬미하는 ‘허구 장르’를 만든 겁니다. 사람들더러 과학, 사실, 이성으로 무장하랬더니, 과학, 사실, 이성으로 무장된 짱 멋있는 허구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 허구의 스토리를 즐기는 상황이란 거죠.
고대엔 각종 신화가 있었고, 중세엔 그리스도교가 있었는데, 그것들의 신뢰성이 떨어지면서 생긴 빈틈을 다른 걸로 메우는 현상, 그게 근현대 이후에 다시금 떠오른 온갖 오컬트의 유행입니다. 점성술, 타로, 유사과학, 사이비 종교, 거짓 신화와 미신 같은 것들이 그것이죠. 즉 모더니즘 이후에 오컬트가 다시 유행한 이유는, 거대한 신화를 담당했던 그리스도교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신이 없는 세계, 부조리함의 극치를 펼쳐보여준 1, 2차 세계대전 탓도 있습니다.
롤로 메이라는 미국의 실존주의 심리치료사가 있습니다. 그가 쓴 ‘신화를 찾는 인간’이란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계와 사회에 신념과 도덕적 목표를 표현하는 신화가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한 우울증이 발생하고 자살이 상존할 것이다’
롤로 메이, [신화를 찾는 인간]
세계관을 통합할 수 있는 종교나 거대한 신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자잘한 미신에 매달리고, 정신병이 생긴다는 겁니다. 롤로 메이의 말에 따르면, 일부 조현병 환자들은 인류의 신화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세계관을 머릿속으로 구축하여 자신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지나친 합리성이 인간을 실존적 위기에 빠뜨린다면, 믿고 기댈 수 있는 신화야말로 인간을 실존적 위기에서 구해낸다는 것이죠.
마치 거대 토착 마피아를 쫓으니 우후죽순 생겨난 양아치들이 주민들을 더 못살게 구는 느낌이긴 합니다만. 여하튼 인간이 인간 사회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느끼고, 삶이라는 실존적 절망, 부조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세계관의 빈틈을 메울 정교하고 바른 허구를 찾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해보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만드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란 얘기를 지금까지 드렸습니다. 우리 사피엔스의 종특이기도 한 거구요, 이 ‘허구를 만드는 힘’으로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 종교와 신념의 불합리한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한 때 계몽주의다 뭐다 해서 다 내쫓아보려고 했던 때도 있었는데, 결국 그에 대한 재반동으로 현대의 잡다한 오컬트와 환상문학이 태동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에게서 이야기를 만드는 본능은 뗄 수 없었다는 거죠. 우리는 현실의 행간을, 허구의 이야기로 메우는 종족입니다.
그런데, 이 ‘허구의 이야기를 만든다’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결국 많은 대중들에게 ‘그럴싸한데?’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첫째, 그럴싸하게 느껴지되, 둘째,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것이 오래 살아남은 ‘허구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즉, 자기 얘기 같거나, 자기한테 유리하거나, 자기네 입장을 잘 대변해주거나, 자기들이 평소 궁금하거나 무서웠던 점을 잘 설명해주면서, 자기네가 싫은 놈을 때려잡을 구실도 주기 때문에 관심이 생기는 이야기인데,동시에 이 모든 이야기가 작법상 개연성을 잘 맞춰놔서 허점이 없다, 그래서 아주 그럴싸하다, 그럼 인간은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는 그럴싸한 이야기, 우린 그것을 계속해서 즐기려고 하고 있고요. 지금까지의 문학이나 영화가 그러한 역할을 일부 담당해왔던 거겠죠.
지금 현재,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이야기 콘텐츠에는 웹소설이란 게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현대’에 속한 인간의 이야기 본능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이야기 본능’이란 걸 가진 호모픽투스이자, 동시에 현대 이 시대의 한국인에게 어필하는 그런 부분들이 결합하여 웹소설을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웹소설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 걸까요?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EBS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웹소설창작전공이 함께 합니다. 오늘의 <웹소설 창작 특강>을 마칩니다.(*)
EBS 오디오천국, 웹소설창작특강 1화 방송 내용을 정리합니다.
전혜정 교수 1회차 강의 / 녹음일 (20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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