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어쩌다 발견한 하루>라는 드라마가 MBC에서 방영되었다. 2019년 10월에 시작해 11월까지 방송되었던 MBC 드라마로, 32부작 미니시리즈이다. 이 드라마는 성공했을까. 닐슨코리아 기준, 최고 시청률은 4.1%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제성만큼은 같은 로맨스 장르인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과 1, 2위를 다툴 정도였다. 참고로 <동백꽃 필 무렵>은 20.7%의 시청률을 기록한 2019년 대히트작이다. 화제성이란 말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화제가 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로, 뉴스 기사, 블로그와 커뮤니티, 동영상, SNS에서 발생한 네티즌 반응을 모아 분석한다. 분석 기관인 굿데이터코퍼레이션에 따르면 21일부터 27일까지, 즉 방영한지 첫 2주 동안에는 화제성에서 무려 연속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시청률은 그렇게 높지 않은데도 화제성만큼은 압도적인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이 드라마가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했으며, 리메이크 전략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매체별로 고정 소비자층이 다르고, 매체별로 적합한 스토리텔링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인기 있던 작품이라도 다른 매체로 OSMU 전개가 될 때 마냥 대중의 환호를 받기 어렵다. 원작의 팬덤은 홍보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원작을 의도에 맞지 않게 훼손했다고 생각하면 무관심보다 더 컨트롤하기 어려운 안티팬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원작 팬덤의 인정을 받아 화제성에서 시너지를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어쩌다 발견한 7월>이라는 이름의 웹툰으로, ‘다음’에서 연재됐던 로맨스 작품이다. 원작 웹툰은 2018년 1월에 시작하여 6월까지 1부를 연재하고, 그 다음 해인 2019년 1월에 다시 2부를 시작하여 9월에 최종 마무리를 했다. 이 작품은 누적 조회수가 6,120만회나 되는 초인기작이었고, 팬덤 역시 튼튼했다.
이처럼 성공한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화되는 케이스는 이젠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기존 경우와는 조금 달랐다. OSMU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종이책으로 출판되는 과정을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보통 웹툰이 인기를 끌면 보통 종이책 출판이 가장 먼저 진행된다. 연재 도중이라도 출판 분량이 확보될 때마다 종이책으로 묶어 출간되고, 출판 마케팅으로 굿즈가 발매되기도 한다. 또는 완결 시점에 맞춰 세트가 한꺼번에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시기를 맞추는 이유는, 한창 연재되고 있는 웹툰이 곧 종이책의 홍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연재 중에 극대화된 충성심, 완결 직후의 만족감과 아쉬움이 책을 구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완결에 맞춰 종이책을 내지 않았을까? 작업상의 어려움일 수도 있고, 나중에 다른 전략으로 출판할 계획일 수도 있고, 건강상의 이유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종이책 출판은 이제 시기에 맞춰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진행해야 할 만큼 매력적인 옵션은 아니었다’란 사실일 것이다.
텍스트를 접할 수 있는 매체로 오로지 종이 밖에 없던 시절은 사실 그리 오랜 옛날이 아니다. 신문 구독을 끊고 인터넷으로 포탈의 기사를 읽기 시작하던 시절에도, 책은 대체로 종이로 봤다. 디지털 뷰어로 책이나 만화, 만화잡지 등이 공급되긴 했지만 그리 대중화되진 않았다. 이 상황이 전폭적으로 변한 건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다. 15년 전의 세상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여전히 종이책에 ‘아우라’를 느낀다. 그 시기에 한쪽 발을 붙인 작가들은 작품이 이북보다 종이책으로 발매되어야 인정을 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나 요즘 작가들도 그럴까? 종이책과 같이 물성 있는 매체가 갖는다는 ‘아우라’는, 현재도 여전히 작동하는 걸까?
경제적 이유
종이책 출판이 매력적인 옵션이 아니게 된 중대한 이유는, 첫째,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글을 팔 수 있는 매체가 더 이상 종이로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화계에서 작가가 벌어들이는 수입 구조가 변화해 온 과정을 잠깐 살펴보자.
만화가가 종이로 된 만화잡지에 연재하던 시절에는 원고료와 함께 단행본 판매 수익을 얻었다. 이때의 단행본 출간은 OSMU 개념이라 보긴 어렵다. 잡지와 단행본은 둘 다 같은 종이 인쇄 프로세스를 갖고 있었고, 종이책을 기반으로 한 작업 방식도 동일하다보니 레이아웃을 대대적으로 새로 뜯어고칠 필요도 없었다. 단행본 출판이란 것은 그저 연재 단계 중 하나에 해당할 뿐이었다. 또한 잡지 연재작은 분량만 된다면 대부분 출간되었기 때문에, 출판은 필수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만화가로서 유력 잡지에 연재 페이지를 얻을 기회는 흔하지 않았지만, 일단 안정적으로 연재하기만 한다면 단행본까지는 하나의 프레이즈였다.
시간이 지나, 웹툰이 플랫폼에 사용자를 유입시켜 페이지뷰를 발생시키는 무료 콘텐츠 노릇을 하는 시절이 왔다. 작가들은 플랫폼에서 받는 원고료와, 종이책 판매를 통한 수익을 얻게 되었다. 문하생 노릇을 하거나 공모전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면서 데뷔 문턱은 낮아졌다. 그러나 연재 작품 대비, 종이책으로까지 출간되는 작품 비율은 크게 떨어졌다. 굳이 종이책으로 만화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출판 만화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행본이 팔릴 것으로 예측되는 인기 작품들만 출판이 되었다. 하지만 그 얘기는, 플랫폼에서 받는 원고료 외의 수익을 얻기 위해서라도, 종이책 출판은 여전히 매력적인 기회였다는 뜻이다.
웹툰 시장이 커지면서, 웹툰은 그 자체로 소비되는 유료 콘텐츠로 변했다. 그에 따라 원고료, MG, 수익쉐어 등 다양한 수익 개념이 생겼다. 이를 통해 웹툰은 완결이 된 이후에도 플랫폼에 거치해 놓는 것만으로도 지속적으로 누적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 인기 있는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되며 추가 수익을 발생시키지만, 오히려 초 인기작일 경우, 새로 레이아웃을 뜯어고쳐야 하는 만큼의 시간과 노력 대비 출판 수익은 그리 매력적이진 않을 수 있다. 그 시간에 작가가 건강을 회복하거나 차기작을 내는 것이 더 이득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완결된 작품을 유료화하여 거치해 둘 경우에는, 플랫폼에서 결제하다고 해서 그것이 영구적인 볼 권리가 아니란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플랫폼 결제는 대여 개념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다음 웹툰’의 경우 결제 후 7일까지만 이용이 가능하다. 나증에 다시 보고 싶을 땐 또 결제해야 하는 것이다. 영구 소장이 가능하여 한 번 구입하면 계속 볼 수 있는 종이책과는 다른 부분이다.
종이에서 태어나지 않은 콘텐츠
둘째, 종이라는 매체는 점점 더 ‘웹툰을 감상하는 용도’의 기능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애초부터 웹툰은 종이라는 매체와는 태생적으로 그리 어울리지 않는 콘텐츠였기 때문에, 어찌보면 예정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매체 스토리텔링이란 개념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매체 스토리텔링이란, 매체, 즉 다양한 미디어의 특성에 따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연구하는 분야다. 그 차이를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 연출이다. 만화는 칸들의 시퀀스와 팬옵틱이 동시에 작용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사 콘텐츠다. 만화가 종이책에 최적화되어 있던 시기에는, 독자는 좌우로 긴 ‘ㄹ’자 모양으로 흐르는 칸의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쫓으면서, 동시에 페이지를 펼쳤을 때 한 눈에 보이는 두 페이지 크기의 팬옵틱한 정서를 동시에 입력받았다. 그래서 모든 만화의 칸 시퀀스, 말풍선, 동선, 칸 내의 레이아웃, 칸 자체의 레이아웃이 이를 위해 설계되었다.
반면 웹툰은 스크롤을 통해 읽는 콘텐츠로, 애초에 페이지 단위로 토막나지 않는다. 브라우저는 개념적으로 아래로 무한하다. 칸의 시퀀스에서 좌우의 개념은 점점 약해지고, 스크롤을 통해 시간은 위에서 아래로, 직선적으로 흐른다. 웹툰은 태생이 종이에서 태어나지 않은 콘텐츠다. 우리가 텍스트로만 된 소설을 AR이나 VR로 읽으려 하지 않는 이유는, 매체와 콘텐츠의 상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매체 스토리텔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최악의 이식이라고 진단한다. 즉 매체의 장점을 살려 그에 맞는 스토리텔링으로 최적화하지 않고, 고민 없이 기존 매체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이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웹툰을 그대로 종이책으로 만드는 행위는,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최적화한 OSMU로 보기엔 어렵다. 물론 종이책 환경에 맞춰 레이아웃을 바꾸는 등 많은 손질을 가하지만,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이를 기존의 출판만화 수준으로 완벽하게 최적화하려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할 정도의 큰 일이 되어버린다. 스마트폰에 맞춰져 있던 폰트와 말풍선 크기부터 시작해서, 레이아웃의 밀도도 바꿔야 한다. 그러자면 레이아웃을 달리 잡아야 하고 칸의 크기를 다시 설계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새로 그려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 있던 웹툰을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하여 종이책으로 출판한다는 것은, 원래의 웹툰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소장용 굿즈 기획에 가깝다. 연재 작가가 직접 레이아웃을 고쳐고, 추가 특별판을 넣고, 부수적인 정보를 집어넣는다고 해도 여전히 ‘읽을 수 있는 굿즈’에 가깝다. 영화 <명량>이 영화 컷컷을 이용해서 책을 낸 것과 비슷한 기획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종이는 웹툰을 ‘전달에 최적화된 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웹툰이 OSMU를 전개해나갈 때, 종이책 출판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아예 OSMU라는 사이클에서 빠지는 것이 좋을까? 아직도 종이를 최적화된 매체로 삼고 있는 텍스트 콘텐츠에만 집중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명량>처럼, 텀블러나 티셔츠와 세트로 발매되는 ‘굿즈’의 역할을 맡는 것이 좋을까?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출판을 통해 OSMU 사이클의 한 역할을 담당하는 기획을 하고자 한다면, 간단하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OSMU 전략을 따라야 한다. OSMU 기본 전략이란 매체 스토리텔링에 충실하는 것이다.
일본 만화 <에반게리온>이 있다. 보통 만화가 원작인데 반해,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원작이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캐릭터 디자이너가 직접 연재한 작품으로,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자신의 재해석을 넣어서 무려 18년 간 연재했다. 애니메이션과 다른 행보를 걸은 것이다. 캐릭터도 다르고, 세계관도 조금 다르다. 미국의 ‘마블 코믹스’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서로 다른 ‘평행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같은 캐릭터들이 나오지만 내용이 다르다. 또 HBO의 <왕좌의 게임>은 어떤가. 책과 드라마 역시 서로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동일한 이야기로 전개되지 않았다. 이런 것을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으로 본다. 트랜스미디어란, 동시다발적으로 각각의 콘텐츠가 개별적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통합적 세계가 창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종이책도 마찬가지다. 이전처럼 원작 작가가 직접 레이아웃을 뜯어고쳐 매체만 바꿔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획진과 다른 작가가 투입되어 종이책에 딱 맞는 작업을 한다면 어떨까? 웹툰 <덴마>의 스핀오프작인 소설 <덴마 어나더 에피소드>와 같은 기획이 많아진다면 어떨까? 독자들은 웹툰을 소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웹툰에는 없는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 소설을 샀다. 이렇듯 앞으로 출판은 고급 굿즈의 역할은 물론, 새로운 기획작으로서 트랜스미디어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