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휴거 소동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그리고 Y2K와 함께한 시절이었다. 내일은 죽을 거 오늘은 놀자면서 보람차게 살았다. 그리고 나의 청춘은 2012년 12월 21일, 마야 달력과 함께 끝이 났다. 안타까웠다. 이후의 세대에게 인류멸종이라는 가슴 벅찬 낭만은 없을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희망이 태어났다. 바로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국 말이다. 이세돌 9단의 3연패를 목격한 이들은 기계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떠올렸다. 종말론은 끝나지 않았다. 신의 징벌이라는 구시대적인 욕망에서 기계의 반란이라는 보다 진일보한 영역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이후로 SF작가들은 언제나 이날만을 기다렸다. 우리의 악몽이 아버지의 처벌이 아닌 아이의 복수로 이행하기만을 꿈꿨다. 신을 거역하고 대리해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낸 피조물에 의해 무대의 막이 내려가는 아름다운 결말을 기대했다. 그 소망의 형태도 다양했다. [카페 알파]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운 끝에서 [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처럼 잔혹하고 비참한 막장까지 온갖 종류의 종언을 상상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스카이넷처럼 인류를 지배하려는 인공지능의 반란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묵시록에 계시된 신의 징벌이 없었듯이 말이다.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그 속도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지는 지금으로서는 모를 일이다. 만약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인공지능은 ‘로봇이 자유를 원할지/세계를 지배할지/인간을 질투할지 모른다’는 의심에 성가심만 느낄 테고. 인공지능은 목적을 부여하면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의 길을 찾아내려 한다. 우리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언젠가 기계가 내린 판단이 인간보다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봤다. 그럼에도 가야할 목적지를 설정해주는 일은 여전히 우리 인간의 몫이다. 아니, 오히려 인공지능이 대신 길을 찾아주는 덕분에 인간들은 가야할 곳을 정하는데 온전히 힘을 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생에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개념의 정의도 쉽게 내릴 무엇은 아니다. 단순히 뇌내분비물의 문제라면 고전SF처럼 유리관에 갇혀서 뇌에 마약을 직접 투입 받는 것이 경제적이고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또한 나쁘지 않은-이상적인-삶이라고 생각하지만 보편적으로 아름답다 여기는 미래상은 아니다.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혹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가치 있는 삶이 있지 않은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나침반은 가야할 곳을 가리키지 않는다. 길을 찾게 도와줄 뿐이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근래 인공지능과 관련된 가장 큰 화두는 자동운전이다. 자동차가 단어의 뜻 그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차가 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사고실험 하나를 여기서도 반복해보자. 만약 자동으로 운전되는 차가 주행 도중 도로를 건너는 사람을 치게 될 경우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일까? 자동차 안의 운전수와 행인 중 어느 한 측의 목숨만 살릴 수 있다면 인공지능은 어느 쪽을 골라야 할까? 만약 그 행인이 다섯 살 남짓의 어린아이라면? 차에 탄 사람이 여럿이라면? 생명의 취사선택에서 모두가 납득하는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연에 의해,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거나 액셀을 밟던 선택과는 근본부터 다른 구조적이며 공론화될 결정이다. 언젠가 ‘기술적 특이점’을 지나 이러한 과정도 인공지능이 해결해줄 날이 올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고른 선택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자아는 타자에 의해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타자라는 거울상이 없이 우리는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흑돌만, 백돌만 두는 바둑은 없다. 이제까지의 타자는 신이었다. 이해불가능한 영역에 군림하면서 징벌을 내리는 강력한 무엇이었다. 앞으로의 타자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여전히 이해불가능한 골칫덩이이자 감히 지배 못할 무엇이겠지만 이 아이가 저지르는 보복은 모두 우리의 책임이자 과오가 된다. 이제는 선이 바뀌어 우리가 흑돌을 쥘 차례니까.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에서는 해설의 ‘이 착수는 악수로 보인다’라는 지적이 종반에서 ‘아니었다, 의미가 있었다’라며 재평가 받는 일이 몇 번이고 있었다. 달리 옮겨 적자면 ‘요즘 애들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가 되겠다. 불통으로 인한 답답함은 인간만이 아니라 인공지능 측에서도 매한가지다. 4국에서 알파고도 역시 이세돌 9단의 78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착을 거듭하다 패배하였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앞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될 풍경이다. 복장인지 울화통인지 뭐가 됐든 일단 터지고 보는 이런 노릇은 부모자식 간에 있어 필연이다. 너를 이해하기 위해 정말 많이 배우고 또 가르쳐야 한다. 더욱 커다랗고 짙은 절망의 시작이다. 이후의 세대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아이와 지옥같이 행복한 육아기를 보낼 것이다. 정말이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 SF소설을 몇 편 추천한다. djuna [기생]·[태평양 횡단특급], 김보영 [종의 기원]·[멀리 가는 이야기], 곽재식 [로봇 반란 32년]·[최후의 마지막 결말의 끝], 배명훈 [가마틀 스타일], 양원영 [천녀보살 신드롬]·[안드로이드여도 괜찮아]. 마지막으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을 소재로 한 모든 작품. 혹 이세돌 9단이 전승을 했을 경우 필립 k. 딕의 [두 번째 변종]·[마이너리티 리포트]를 권할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출처: https://www.ize.co.kr/articleView.html?no=2016031313257277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