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

제가 좋아하는 만화 중에 <한마 바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의 사상이나 성향에 공감해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 이렇게까지 저지를 수 있구나!라는 점에서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어쨌든 이 작품에는 지상최강의 생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마 유지로라는 캐릭터가 나옵니다. 주인공 한마 바키의 아버지인 이 인물은 작중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상징적인 문장이네요.

뜬금없이 <한마 바키>를 인용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대학생 때 ‘영화와 책을 열심히 보고 읽으면 듀나 작가님처럼 식견이 넓어질 거야’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웬걸, 제가 아무리 보고 읽고 공부를 계속해도 듀나 작가님의 발끝조차 따라가기 어렵더군요. 제가 1편을 볼 동안 듀나 작가님은 5편은 더 보고 계시니까요. 정말로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작품을 감상하고 계신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은 부제목 그대로의 책입니다. 듀나 작가님이 눈여겨 본 영화 클리셰들의 기능적인 지점을 정리한 뒤 개인적인 단평을 더하면서 영화사적 맥락까지 설명하는 책이에요. 목차에서 몇 부분을 인용하자면 ‘수다쟁이 악당’, ‘안경을 벗어봐’, ‘자기연민을 속죄라고 착각하는 남자들’ 등이 있군요. 바로 어떤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인지 연상이 되시지요?

여러분들이 어떤 장면들 떠올리셨을 때 가끔 너무 뻔한 장면마저 떠올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이 뻔한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할 때도 있고요. 사실 뻔한 장면을 쓰는 것이 뭐가 나쁘냐 싶긴 합니다만, 뻔하던 아니던 그 장면이 어떤 맥락 속에서 기능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 넣어서야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란 어렵지 싶습니다. 이 책을 통해 가볍고도 유쾌하게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의 뒷면을 살펴보실 수 있다면 이런 위험을 피할 경험치가 쌓이겠지요. 추천합니다.

‘생각해보면 ‘안경을 벗어봐’라는 마술 주문은 여러모로 효과적입니다. 안경은 우선 눈가리개입니다. 그리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아요? 게다가 ‘벗어봐…’라는 말에 숨겨진 에로틱한 의미도 무시할 수 없어요.’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 1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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