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505호] 아카데미에서는 장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전혜정)

아카데미에서는 장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질문을 ‘국내 대학의 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에서는 장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로 바꾼다면, 흔히 회자되는 답변은 다음과 같다.

“문창과는 등단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순문학 중심의 수업을 한다. 다만 학생 모집이나 취업률 등을 보완하기 위해 대중적인 글쓰기 수업을 일부 도입하는 추세다. 그 일환으로 장르문학도 어느 정도 수용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답은 그렇게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 이를 둘러싼 논의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장르와 장르문학은 다르다’는 말에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만약 국문학 전공자들에게 ‘오래전부터 장르에는 흔히 어떤 갈래가 있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리스 시절부터 최근까지 통용되어 온 삼분법을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서정양식, 서사양식, 극양식이 그것이다. 반면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을 무작위로 선정해서, ‘어떤 장르를 볼 예정인가?’라고 물어본다면, 로맨스,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 액션, 어드벤처, 스포츠 등과 같은 용어를 말할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게임을 사러 온 유저에게 판매원이 ‘좋아하는 장르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RPG, 퍼즐, 액션, 어드벤처, 시뮬레이션 등의 용어를 말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세 경우의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이 ‘장르문학 중에서는 어떤 장르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이럴 경우 국문학 전공자나 게임유저라도, 영화관객이 사용했던 용어로 답할 가능성이 높다. 장르문학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서 구분해 온 장르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장르와 장르문학이 다르다는 말은, ‘문학에서의 장르’와 ‘장르문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르문학’은 특수한 하나의 용어가 되었다. 현재 우리와 같은 일반 대중들이 흔히 이해하고 있는 ‘장르문학’은, 기존 문학계에서 연구해온 전통적인 ‘장르-문학’이 아니다. 전통적인 문학에서는 장르를 ‘공통적인 특질을 가진 문학작품들이 모여서 하나의 일관된 틀을 구축한 것’ 정도로 크게 정의하고 그 세부 연구를 다양하게 진행해 왔다. 이렇듯 정의의 폭이 크기 때문에 지금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장르문학 담론도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계보만으로는 항상 결정적인 부분에서 미끄러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학계의 담론이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출판업계에서는 이미 장르문학이 화두가 되었는데, 학계의 담론은 그저 업계와 소비자가 함께 만든 정의를 쫓아가는 데에 급급하다는 인상만 준다. 학계의 담론이 정체되는 동안 장르문학을 명명할 필요성은 커져왔다. 국내에서는 흔히 신문에서 연재되던 통속적인 소설을 비롯하여, 해외에서 들여 온 일군의 소설들을 한꺼번에 대중문학이라는 말로 통칭해왔다. 대중문학이라는 용어 자체만으로는 그 어떤 속성도 말해주지 못함에도 말이다. 그러나 서양이나 중국, 일본 등에서 건너 온 일군의 소설들이 각자 일정한 관습을 갖고 있음이 명확해지고, 국내 독자들이 그 관습을 학습하여 취향이 만들어지고, 이 관습과 개인의 취향이 매칭되고, 관습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국내 작가도 생기고, 그에 따른 독자군이 재형성되었다. 이젠 이 관습들을 가진 문학을 속성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장르문학은 취향이 중요한 문학이고, 취향이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군의 작품들을 장르문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장르문학이라는 용어는 대중문학이라는 용어를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장르문학은 대중문학과 같은 뜻인가? 그렇지 않다. 대중문학은 좀 더 다양한 대중들을 타깃으로 하는 문학이라는 느슨한 범주일 뿐이다. 예전에 대중문학이라고 불렀던 작품들 대부분을 장르문학으로 부르게 되면서, 용어가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 정의까지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장르문학이 대중적인 재미를 목적으로 시작한 문학이라고 해도 말이다. 장르문학이라는 용어는 작품 자체가 가진 속성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타깃층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용어를 일대일로 대체한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 때문에, 장르문학에 대한 오해도 복잡해졌다. 마치 장르문학이 곧 보편 대중을 위해서 창작되는 상업적인 소설이며, 그래서 인간에 대한 탐구나 미학적이고 지적인 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아카데미적 문학과는 정 반대에 있다는 오해다. 그런데 장르문학에 정말 대중성이 있나? 대중성과 상업성은 같은 것인가? 장르문학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주류인가? 그리고 장르문학의 맞은편에 ‘순문학’을 두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순문학은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는 뜻인가? 김훈의 소설이 더 주류인가, 왕좌의 게임 소설판이 더 주류인가?

‘순문학’은 조금 난폭한 용어다. 학계에서 다뤄온 문학, 즉 아카데미적인 문학들을 칭하기 위해, 그리고 대중문학과 구분하기 위해 순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아카데미란, 그리스 시대에 철학을 연구하던 기관인 아카데미아에서 유래하여, 르네상스 이후부터는 학계를 뜻하는 용어이다. 요즘은 학원을 아카데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학계와 대학을 묶은 어떤 ‘예술제도’를 말한다. 이 아카데미라는 제도에서는 어떤 문학을 취급해오려고 한 것일까? 예를 들자면, 인간과 인생에 대해 탐구하는 문학, 예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표방하는 문학, 아니면 사회 참여 문학 등을 연구하려고 할 것이다. 또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보편성과 항구성을 가져 고전이 되려고 하는 문학을 창작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이 흔히 말하는 순문학이다.

그런데 모든 제도는 스스로를 유지 존속시키기 위한 편입 과정이 필수다. 당연히 아카데미 문학에도 편입 과정, 즉 ‘데뷔’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제도의 승인이다. 문학계에서는 이 승인 역할을 주로 담당해 온 것이 등단 시스템이다. 그래서 순문학을 문단 문학이라고도 부른다. 결국 순문학은 제도 문학이라는 뜻이 된다. 제도의 기준은 간단하다. 제도의 승인 절차가 제도에 속한 것과 아닌 것을 가른다. 뒤샹이 가게에서 사온 남자 소변기를 갤러리에 출품했을 때, 예술 제도가 그것을 승인했기 때문에 ‘샘’이라는 현대미술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승인받지 못한 다른 소변기들은 여전히 상품일 뿐이다. 어떤 제도라도 승인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므로, 승인 절차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승인 절차를 누가 하고 있으며 어떤 기준으로 하고 있는가는 때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장르문학은 순문학인가 아닌가를 묻는 건 핵심에 다가가는 질문이 아니다. 순문학은 제도 내에서 읽어낼 수 있을 법한 모든 종류의 작품을 승인할 수 있다. 이는 우위를 점하려는 행동도 아니고, 숟가락을 얹으려는 행동도 아니다. 한편 장르문학은 할리우드식 구분을 따르는 만큼,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는 영화와 비슷하다. 그래서 제도의 승인이 크게 의미도 없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그 제도 자체를 부정하며 굳이 거리를 벌리려고 할 필요도 없다. 장르문학 중에 기존의 제도 문학의 기준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승인될 수도 있고, 반대로 제도 자체의 외연이 넓어진다면 어떤 작품들은 저절로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르문학이 서로 간에 더 발전하려면, 아카데미 제도가 무능해지기보다는 차라리 바른 권위가 있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등단 시스템이 장르문학을 유독 박하게 평가하고 있는가? 승인되고도 남을 작품들이 장르문학 관습을 가졌다는 이유로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순문학 제도는 앞으로 장르문학을 의도적으로 차별할 작정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간 차별을 받았다면 제도 그 자체가 존재해서라기보다, 승인 절차의 문제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추가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장르문학은 대중적인 글쓰기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장르문학계에서 흥행에 성공한 작가들의 이름보다 순문학 작가들의 이름에 더 익숙한 것일까? 대중들이 더 잘 아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순문학은 주류 문학인가? 주류인데 왜 대중문학은 아니라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려운 이유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다’는 뜻과 ‘대중성’은 다르기 때문이다. 주류 언론은 원래 주류 제도를 뒷받침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제도에 속한 문학을 적극적으로 다룬다. 다양한 연구 논문들을 대중성이 없어도 주류 언론이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조명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논문을 직접 읽지는 않는 대중들도 주요 연구 성과들을 널리 알게 되는 원리다. 반면 장르문학이라고 해서 꼭 다 대중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했듯이 취향을 학습한 독자들을 타깃으로 할 뿐이기 때문이다. 취향을 가진 이들이 많으면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상업성조차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거기에 주류 언론이 잘 다뤄주지도 않는다. 따라서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상업적으로 성공할지라도, 잘 나가는 제도 문학보다 비주류로 인식되고 대중에겐 덜 알려질 수 있다.

이제 ‘아카데미에서는 장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다시 대답해보고자 한다. 아카데미는 제도이며, 이 제도의 바탕은 인문과학이다. 인문과학, 즉 humanities는 단어 그대로,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인간의 사상과 예술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고, 인간과 세계가 맞닿는 지점을 탐구한다. 이 제도는 그간 장르문학을 잘 몰랐고, 편견을 가져온 건 사실인 것 같다. 등단 시스템만으로는 장르문학을 공평하게 봐주지도, 발굴해내지도 못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장르문학계에서는 상업성도 가진, 그리고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읽어낼 만한 작품들을 내놓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순문학 제도에서는 등단 시스템을 공평하게 손보아서 장르문학의 인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발굴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순문학이 장르문학의 우위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인문학적인 가치를 가진 작품들을 만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