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502] 혐오의 정서에는 무엇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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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 겨울은 정서적으로도 추운 한 해가 계속되었다. 연예인의 죽음과 수많은 범죄와, 범죄조차 되지 못한 사건사고들이 미디어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특히 나를 가장 격동시켰던 사건은 설리와 구하라의 잇따른 죽음이었다. 그룹 f(x)와 카라는 내가 20대일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아이돌이었다. 특히 카라의 경우는 일본어 공부를 할 때 일본 예능에 나오는 그들의 모습을 유튜브로 찾아보았을 정도로 오랜 팬이었다.

혐오에 대해서 조금 더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다. 혐오로 인해 일어나는 범죄는, 사건은, 사고는 실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매우 낮았다. 고인의 전 애인이라는 유튜버가 TV에 나와서 연예인들은 악플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고, 악플을 썼던 사람들은 악플이 하나의 권리인 것처럼 부르짖었다. 이건 단순히 악플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혐오의 정서를 개인이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견디란 소리다.

그러나 혐오는 개인이 감내할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다. 혐오는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되지 않은 역사적, 구조적 맥락의 비난이다. 비난받는 개인은 구조와 마주해야 한다.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비난과 모욕을 그저 견디는 것은 사회와 감정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던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아이돌이나 스타 등 개인 앞에 나선다는 것은 그 구조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혐오, 낯섦

마침 한 신문사의 칼럼란에 공간을 얻었다. 두 달에 걸쳐 미디어와 혐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첫 칼럼은 설리의 죽음과 앞뒤로 연결되어 있었고 두 번째 칼럼은 구하라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원래 칼럼을 넘기면 댓글을 잘 확인하지 않는데 칼럼이 올라가자마자 달린 댓글이 궁금했다. 두 개의 댓글 중 하나는 비아냥이었다. ‘혐오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미워한다는 것인데 왜 구조니 뭐니 어려운 말로 혐오를 복잡하게 하냐’면서, ‘이런 단어는 페미니스트들 같은 애들이나 쓰는 거 아니냐’는 얘기였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혐오라는 단어가 부상된 것은 페미니즘의 부상과 연결된 맥락이었으니까. 개그맨들의 음담패설이 팟캐스트 라디오방송을 통해 나오고 해당 연예인의 예능방송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에서부터 ‘메르스 갤러리’라는 커뮤니티의 등장까지, 혐오라는 개념은 어느 순간 인터넷 지형도 안에서 폭발하며 가시화되었다.

혐오, 개념

혐오라는 단어는 이때까지도 낯선 것이었다. ‘미소지니를 여성혐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는, 학술 담론장에서는 오래전에 나왔던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중은 여성혐오라는 개념은커녕 미소지니라는 단어 자체를 처음 듣는 경우도 많았다. 인문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어는 대중에게 제대로 정착되기 힘들다. 대부분의 인문학 용어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용례들을 종합하여 함축한 뒤 문장구조 또는 사용구조 속에서 상징화된 것들이다. 더구나 서양철학을 기반으로 한 개념어들은 중역 또는 번역되어서 국내에 소개된 탓에 국내의 언어를 이용해 만든 비평적 조어가 아닌 경우도 상당하다.

담론장의 언어는 점차 사투리화되고, 입법된 언어들을 이용한 논의가 대중에게로 닿지 못한 채 무의미하 게 공회전했다. 의미의 엄밀성을 위해 고유명사를 번역 없이 원어 그대로 사용하기까지 하는 학자들과 영화 비평 칼럼에서 ‘명징’ ‘직조’ 두 가지의 단어를 썼다고 반발하는 대중이 마주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혐오’는 학 술적 용어인가. 한국사회에서 혐오라는 말이 갑작스럽 게 인터넷 공간에서 가시화된 것은 전술했듯이 개그맨들이 했던 혐오 발언들과 그 뒤를 이은 여성혐오 사건들 때문이었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에서 ‘맨스플레인’ 등의 어휘가 공감대를 얻으면서 유행하였고 SNS에서는 자신이 당했던 여성혐오에 대한 고백이 해시태그 이벤트와 함께 이어졌다. 전후에 문단내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여성 혐오 범죄들이 연달아 터졌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가 불평등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의 언어를 몰랐던 자들이 언어를 획득했다. 연대의 시작이었다.

담론과 연대를 주도했던 학자나 운동가가 아니라 고통에 견디지 못했던 개인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들이 한 개인으로 남길 바랐지 정체화되거나 규명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불합리를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학습했고 시기에 맞춰 좋은 책들이 계속 출간되었다. 덕분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다른 방향의 인식도 활성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축소된 것은 혐오 그 자체의 문법이었다.

우리는 혐오하는 쪽과 혐오를 당하는 쪽의 이분법적 프레임을 갖고 이야기한다. 장애, 소득수준, 젠더, 정치와 지역 등 특정 정보를 끊임없이 혐오와 연결지어 혐오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바꿔 말하면 무슨 명명 작업을 제외하면 혐오 그 자체의 동력이 무엇인지, 어떤 정서가 들어가 있는지는 주목하지 못했다. 혐오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의 접근은 낡은 계몽주의, 모르기 때문에 혐오를 진행하고, 알면 자기가 있던 세상이 붕괴되고, 그 과정에서 충격을 겪은 개인이 견디지 무너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변화한다는 낡고 무의미한 알레고리만이 도출된다. 이러한 구조는 담론을 만 들어내지 못한다.

지금은 ‘나는 혐오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좀더 적 극적으로 혐오를 실천하겠다’는 선언들이 심심찮게 터져나온다. 이들이 과연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혐오고 폭력이고 사람들을 상처입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혐오를 실천하는 것인가? 사회 복지를 무임승차자라고 경 멸하고 학벌로 지위고하를 가르며 연봉의 숫자는 삶의 가치가 된다.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콘텐츠들 을 ‘노잼’이라고 이야기하며 가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혐오를 재미로 소비하는 집단이 명명으로 변화할 것인가.

혐오, 구조

혐오에서 재미를 찾고 놀이화된 것은 혐오의 위계 바깥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정서이다. 혐오는 두 집단 사이를 끊임없이 유영한다. 혐오를 발화하고 실천하는 집단과 그것이 혐오라고 명명하며 언어로서 세상을 독 해하려는 집단. 이 두 지점의 권력 관계를 짚는 것은 담론 차원에서 옳겠지만 현상 차원에서는 그르다. 이러한 집단은 실체가 없고 서로의 권력 구조 역시 안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이다.

혐오는 가해자에게서 만들어져서 피해자에게서 완성된다. 초기의 혐오는 혐오가 왜 혐오인지, 불쾌감의 감정과 차별로 인한 결과는 있지만 개념화할 언어가 없는, 이른바 저인지 상태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저인지 상태는 현상을 딛고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의 세계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자들은 언어를 고심하지 않는다. 이것이 혐오라는 개념으로 부상하는 것은 피해자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언어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혐오는 명명되는 그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계를 확정시킨다.

혐오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이다. 출생지역 갈등이나 장애, 인종 문제와 성별 문제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혐오는 그것이 형성될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즉 혐오의 층위는 지금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혐오와 공동체의 기억으로 받아들인 혐오, 이렇게 이중으로 이루어진다. 가해자-피해자의 구도를 바꿔내는 것은커녕 내가 피해자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고통의 기억은 공동체의 확장과 함께 끊임없이 누적된다.

가해자-피해자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방식은 자신을 청자에서 발화자로 바꾸는 것이다. 혐오행위자, 또는 혐오 표현 등을 공론장에 세우고 적극적으로 비판을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람들은 나의 연대를 언제든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내 발화를 그 속에 자연스럽게 섞을 수 있다.

이 순간 혐오에 대한 발화는 세력 싸움으로 변화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에게 동조해주는가. 최근 영화 <겨울왕국2>의 상영관에서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시끄럽고 방해가 된다며 영화관을 ‘노키즈 존’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언론은 이 논란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사람들에게 투표를 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대중의 인식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혐오 그 자체에 대한 판단을 기계적으로 유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언론 한편에 목소리를 강하게 실어준 것이다. 도서판매 사이트에서는 페미니즘 책과 함께 오세라비의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좁쌀한알)를 묶어 팔았고 방송사는 양극의 진형을 모아 혐오 발언 전시를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이슈화했다.

혐오를 복제하고 전시하는 자들에게 혐오는 대상자들의 분노와 굴욕의 천칭을 대칭관계로 만들기 위한 추에 불과하다. 이건 감정을 자본으로 만드는 게임일 뿐이며 무엇이 혐오인지, 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이고 그 미래에는 무엇이 있는지 등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내가 썼던 칼럼란의 댓글로 돌아가자. 그 사람이 혐오라는 것을 사전적 의미로만 이해하려고 한 것은, 혐오라는 단어에서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나 하는 행위라고 비아냥거린 것은 그가 과연 혐오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그는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소리’의 혐오 뜻을 알고 있지만,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만큼 혐오의 뜻을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혐오의 뜻을 취사 선택하며 자신의 진형을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놀이행위나 다름없다.

놀이의 규칙과 보상이 유효한 것은 놀이가 진행되는 동안뿐이다. 놀이행위가 끝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지금의 혐오 관련 이야기들은 과연 담론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곧 다가올 휘발을 위해서 그저 발작적으로 발화의 양만 채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