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담론(이융희, 전혜정)

공포라는 감정은 무엇인가?

호러는 보는 사람에게 공포와 경악이라는 부정적인 정서를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키려는 장르를 말합니다. 도대체 부정적인 감정들을 사람들은 왜 즐기려는 걸까요? 왜 행복하고 즐겁고 웃음이 터지는 긍정적인 감정들에 만족하지 않고, 처절하게 슬프거나, 혹은 오늘 이야기할 끔찍한 공포심 같은 감정까지 일부러 경험하려는 걸까요?

이에 답하기 전에 ‘공포’가 인간에게 무엇인지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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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러브크래프트

H.P. 러브크래프트는 『공포 문학의 매혹』에서, 공포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감정도 공포보다 원초적이진 않다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공포는 죽음을 피하려는 본능적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동물로서, 삶을 유지하고 죽음을 피하도록 설계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존재는 존재하고자 하죠. 아주 작은 날파리조차 죽음을 피하기 위해 파리채를 피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이렇듯 죽음을 피하려는 감정과 반응과 행동은, 인간이 이성적 인간이기 이전, 생명체로서의 가장 원시적인 본능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존재의 끝이라는 걸 알고 있죠. 하나의 존재로서 존재의 종말인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 공포라는 감정은 이 본능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사나운 짐승, 높은 곳, 독충이나 독사의 형태에 공포심을 느껴왔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을 발명합니다. 그것들이 죽음을 부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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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것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예측할 수 없는, 모르는 것, 즉 미지의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으면 그것을 통제할 수단을 발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식으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데, 그에 대한 수단을 마련할 수 없을 때, 인간의 공포는 극대화되고 절망을 느끼며 끝내는 무력감에 압도됩니다. ‘미지에 대한 공포’, 결국 이 말은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와 동의어입니다.

통제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 – 어둠

그렇다면 예측할 수 없는 것, 통제가 불가능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인류 초기에는 어둠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첫 말이 ‘빛이 있으라’인 것만 봐도, 인류의 문명은 어둠의 공포를 쫓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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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어둠 속에 무엇이 등장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불을 쓰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극복된 것이죠. 불은 문명의 상징입니다. 기술, 과학, 종교, 조금 비약하자면 이러한 모든 문명은 인류가 죽음의 공포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시켜온 것이기도 합니다. 즉 거꾸로 말해 문명의 반대에 있는 것이 공포의 영역이 되겠죠.

통제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 – 야만

그렇다면 문명의 반대에 있는 ‘야만’도 공포의 소재가 됩니다. 과거에 식인종을 어떻게 무시무시한 존재로 묘사했는지 떠올려보세요. 원시 사회에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장면을 공포심을 강조하는 장치로 썼던 『아포칼립토』 같은 영화도 있죠. 여성을 불가해한 존재로, 이성적인 남성의 반대에 있는 존재로 여겨지던 시기에 등장한 많은 전설이나 괴담들, 즉 세이렌이나 마녀, 처녀귀신 같은 존재들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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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포칼립토의 제식
통제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 – 질병, 자연재해, 운석충돌, 괴물

예측할 수 없는 것, 통제 불가능한 것 대한 공포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현대의 과학으로는 원인도 해결책도 알 수 없는 질병, 거대한 자연재해, 운석 충돌, 인간이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거대한 야생 짐승들도 당연히 해당되겠죠. 『킹콩』 같은 작품이나 다양한 재난물들이 등이 이런 소재에서 비롯된 공포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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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 –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상상력을 조금 더 덧붙여봅시다. 시체가 움직인다면? 죽은 자가 영혼이 되어 돌아온다면? 인간을 해코지하려는 악마나 정령, 괴물 같은 존재가 있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나 물건에 사악한 영혼이 붙어있다면? 즉 합리적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다루는 『드라큘라』나 『로즈메리의 아기』, 『샤이닝』 『엑소시스트』, 『사탄의 인형』 같은 오컬트물이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시작된 좀비물이 이 방향에 속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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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큘라
통제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 – 외계, 심연, 과학이 닿지 못한 곳

또 다른 방향으로 상상해봅시다. 우주 너머에서 인류를 파괴하기 위해 외계인이 온다면? 예측 불가능한 가장 대표적인 존재겠죠. 우주 어떤 곳에 진짜로 지옥이 있다면?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고 거대한 우주적 존재가 지구의 심해 속에 있다면? 거대한 미지를 다루는 『미스트』 『에일리언』같은 SF 호러물들과, H.P 러브크래프트의 코즈믹 호러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통제물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 – 통제를 벗어난 인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아니면,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거나, 통제를 벗어난 인간의 경우는 어떨까요? 패륜적 사이코패스나, 사람을 죽이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연쇄살인마나, 복수심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상태거나, 난폭한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자라거나, 뭔가의 부작용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하겠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싸이코』, 『더 플라이』 『검은 집』 그리고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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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통제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 – 지나치게 빨리 발전하는 과학

또 이런 건 어떤가요? 과학 기술이 인간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해서, 안드로이드가 인류를 지배하려고 드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인간이 연구 윤리를 넘어서서 창조한 과학적 존재들은 어떤가요? 과학 기술의 빠른 발전이 결국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감각은,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도 발견할 수 있었죠. 『프랑켄슈타인』이나 『터미네이터』 같은 작품들이 선사하는 공포가 그런 것입니다.

통제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 –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종교나 문화

익숙하지 않은 종교나 문화도 공포의 대상입니다. 이슬람포비아, 호모포비아 등도 그 일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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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포비에 반대하는 집회

반복해서 말씀드렸듯이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미지에 대한 공포’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잘 예측할 수 있었고,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어느 한 순간, 미지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느끼는 공포를 특별하게 포착하는 작품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흔히 ‘일상의 공포’라고 부르는 작품들입니다. 거대한 존재나 거대한 악이 등장하지 않지만 가장 친밀한 가족이 내가 알던 그 가족이 아니게 되고, 내 친구가 내 친구가 아니게 되며,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인 집과 침대가 낯선 것이 됩니다. 이런 걸 포착하는 작품은 특히 아시아에서 강세입니다. 『여고괴담』이나 『링』,『주온』이 그렇습니다. 또한 『로즈메리의 아기』에서 아파트 주민들, 그리고 남편의 역할이 그렇습니다. 또한 『화이트데이』 같은 호러 게임에서처럼, 낮에는 지루하고 일상적인 학교지만 밤이 되면 무시무시한 장소로 변해버리는 이야기들이라거나,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늦은 밤에 마중 나와 준 엄마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니?’ 라고 묻는다는 도시 괴담류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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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온, 숨고자 했던 이불 속에서 원혼이 등장하는 장면

이렇듯 많은 이야기 콘텐츠에서 공포라는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다양한 소재를 사용합니다. 나아가 호러 장르는 공포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본격적으로 다루어 극대화시켜 경험시키고자 하죠. 그리고 공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럼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스스로 찾아 경험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두려워하는 대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본능 역시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포에 맞서 문명을 발전시켜 온 힘이죠. 미지의 대상을 알아내고, 이해하려고 하고, 만족할 만한 설명을 찾고, 피하는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더 강한 힘과 무기, 과학과 기술, 또는 난폭함과 잔인함으로 제압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직접적인 실체는 죽음, 바로 그 자체입니다.

이렇듯 인간이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상, 인간에게 가장 호기심을 일으키는 대상도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인간이 죽음을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이상, 죽음을 피한 순간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의에 의해 무력하게 죽고 싶어하지 않는 이상, 타인을 향한 변태적이고 잔인한 폭력성을 내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인간이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분비하는 호르몬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에게 처방하는 화학물질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삶의 의지가 강해집니다. 죽음에 가까운 감정을 경험하고 나면, 인간은 스스로 살아있다는 감정을 강력하게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는 안전한 상황에서, 죽음의 공포만을 경험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철학의 용어로서 숭고미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움, 외경, 양적 질적으로 거대함 앞에서 압도되고 무력해지며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를 칭하는 미의식을 말하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포라는 감정은 숭고미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 설명 드렸습니다만, 인간의 이런 공포를 다루는 장르를 호러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호러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인 ‘공포’를 다룸으로써, 안전한 죽음을 체험하게 만들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2. 사회를 비추는 거울

한국 공포영화에는 왜 한 맺힌 여성 원귀가 등장하는 걸까요? 아시아에서는 왜 학교가 공포의 무대로 등장하는 걸까요? 서양에서는 왜 호러 영화에 마녀를 등장시키곤 하는 걸까요? 미국인인 스티븐 킹은 왜 오버룩 호텔이란 곳을 설정했던 걸까요? 왕따 소녀 캐리는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걸까요?

공포는 사회의 부조리한 이면의 재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생각해봅시다. 여성원귀가 괴기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67년 이후로, 그 이전엔 불가사리, 미친 과학자, 우주괴인 등 다양한 형태의 괴물에 대한 상상력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서구적인 괴물들이었죠.

그러나 67년 이후 <월하의 공동묘지> <두견새 우는 사연> <한> <처녀귀신>등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귀신들의 모습으로 주를 이룹니다. 한국적인 여성 원귀의 시작이었죠. 이것이 김기영의 하녀 연작들 <하녀>, <화녀>, <충녀>에서 살아있는 여성괴물로서 하녀나 호스테스로 대체되었다가, 1998년에 <여고괴담>으로 여귀가 교복을 입고 부활합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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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의 공동묘지

가부장적 유교 문화에서 미혼여성은 가장 사회적인 약자입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처녀귀신’이라는 존재는 ‘억압된 것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억압된 것이 귀환한다는 상상은 죄책감을 가진 인간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포입니다. 문화권을 가리지 않죠.

한국에서는 미혼여성이 처녀 귀신이 되어 귀환했지만, 스티븐 킹의 『캐리』를 보세요. 왕따를 당하던 존재가 돌아와 공포를 선사하죠. 이는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죄책감의 발현이자 투사입니다. 배척하고 혐오해서 일상과 이성의 외부,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냈던 존재는 그래서 다시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혐오 대상에 대해, ‘자신을 미워했던 우리를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 라는 투사적 공포입니다. 많은 공포 장르에서 주인공이 죄책감을 가질만한 잘못을 저지르며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일상의 공간에서 배척된 존재는 비일상의 공간이 될 때 돌아옵니다. 그래서 호러 장르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무대입니다. 무대 설정만 봐도 동서양의 차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서양이 중세 성이나 교회, 오래된 저택을 무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면, 한국과 일본 등에서는 ‘학교’가 괴담의 무대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 차이는 호러 장르가 사회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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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사회적으로 가장 부조리한 장소가 곧 공포의 장소가 되는 것이죠. 대학 입시 경쟁이 치열한 아시아에서 학교란 부조리한 장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적 지상주의, 왕따, 자살, 교사에 의한 폭력 등이 <여고괴담>에 녹아들면서, ‘같은 학생이 3년마다 졸업하고 있다’는 단순히 오싹한 괴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훌륭한 호러 장르로 기능하게 됩니다. <샤이닝>이 미국 사회의 부조리한 이면을 오버룩 호텔이라는 상징적인 무대 위에서 드러낸 것과 비슷한 역할일 것입니다.

  1. 박주영, 「1998년 이후 한국 ‘귀신 영화’에서의 여성 재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4, pp.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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