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맨스 장르란 무엇인가?
로맨스 소설의 핵심은 발전해가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지만 제일 중요한 사건은 주인공들의 연애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서 ‘발전해나간다‘는 말은, 순조롭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양한 장애물을 헤쳐 나가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로맨스는 중세 기사도 문학인 로망스Romance부터 그 계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라틴어가 아닌 토속 로마 방언들로 지어졌다고 하여 로망스 문학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는데, 중세시대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의 모티브를 담은 중세로망스는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귀족사회의 법도와 관례를 알려주는 친절한 예절 교본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자주 사용되는 소재는 아서왕의 전설이었죠.







이러한 중세로망스의 전통은 시대를 거쳐 현재의 로맨스 소설로 이어집니다. 현재의 로맨스 소설의 사상적 기반은 18~19세기 등장한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념입니다. 조금 거칠게 비약하자면, ‘결혼의 바탕에는 낭만적 사랑이 기반되어야 한다’는 가치관도 근대의 발명인 것이지요.
16세기를 전후할 때까지만 해도 육체적 욕구 중심이었던 ‘열정적 사랑’은 곧 ‘낭만적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전환을 잘 보여준 고전 명작이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파멜라, 또는 보상받은 미덕』(Pamela,or Virtue Rewarded)』입니다. 흔히 ‘파멜라’라고 불리는 이 소설은, 한 인쇄업자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그는 처음에 편지 양식을 가르쳐주는 실용적인 목적의 안내서를 기획했는데, 여기에 여성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까지 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 소설의 효시로서,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주인도련님을 거부하는 정숙하고 현명한 15세 소녀 파멜라의 이야기를 서간체 양식의 소설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잘생기고 부유한 주인도련님이 한 하녀에게 반해,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선물공세, 애원, 사랑고백, 강압까지 온갖 방식을 동원하고 있고, 거기에 팽팽히 맞서서 자신의 가치관을 지켜내며, 결혼이라는 숭고한 결합이 될 때까지 버티는 파멜라의 모습을요. 이것은 밀고 당기며 호기심과 긴장감을 고조하는 로맨스의 원형이나 다름없었고, 파멜라는 작가의 ‘엄숙한’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게 소비되면서 전 유럽에서 흥행을 합니다.
현대적 로맨스는 1908년 영국의 밀스 앤 분Mills & Boon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밀스 앤 분은 당시 유행하는 추리 소설이나 다른 여러 소설과 함께 현대적 로맨스의 형태를 창작, 배급하는 출판사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캐나다 출판사 할리퀸Harlequin이 북미 대륙 배급을 시작하는데, 1970년대에 밀스 앤 분이 할리퀸의 지사가 되면서 합병되었고, 전 세계 배급을 노리는 거대 출판사가 됩니다. 1981년에는 할리퀸이 캐나다 미디어 그룹 토스타Torstar Corporation사에 인수됩니다. 2014년에 이르러선 미국의 미디어 그룹 뉴스코프News Corp가 이를 인수해 자회사 하퍼콜린스HarperCollins에 편입시키며 전 세계 2억 명 규모의 거대 로맨스 시장을 책임지게 되지요.
이렇게 소위 전형적이라고 불리는 이야기들이 쏟아지면서, ‘수동적인 여성에 대한 구원서사’일 뿐이라는 비판도 함께 커져 현대에 이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고 섣불리 내린 판단입니다. 현대 로맨스 장르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남성의 결핍, 그리고 여성의 결핍. 이 두 사람의 결핍이 서로 마주하면서 성장해 동등한 지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한국 로맨스의 계보
한국 로맨스 장르의 계보는 만화 시장에서도 발견됩니다. 1950년대 잡지사가 상업시장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근대 시기 열정적 감정을 이야기하던 ‘순정’과 사랑의 서사와 일본의 쇼조망가(少女漫畫), 즉 소녀만화의 그림체를 조합해서 ‘순정만화’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이 순정만화란 것은, 곧바로 한국의 걸출한 순정만화 작가들에 의해 한국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되지요. 아무튼 당시 순정만화 시장이 겨냥하던 타겟층과, 1979년 수입된 할리퀸 브랜드가 겨냥하던 타겟층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여성들을 위한 로맨스 장르 시장입니다.
할리퀸 문고본은 이 당시엔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로 수입되었는데, 해당 소설은 하이틴 로맨스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성애 장면이 주요한 포인트였고, 성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되었습니다.









감정이 고조되고 극적 변화를 얻는 장면에는 관습적으로 성애 장면이 들어가 있던 것이지요. 여성들을 위한 안전한 포르노로서 배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는 당시 제대로된 판권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해적판 자료였으며, 이러한 수입-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90년대에 들어 신영미디어라는 출판사가 활약하면서부터입니다.
90년대 할리퀸 로맨스를 정식으로 수입, 배급하던 신영미디어는 96년 한국의 로맨스 시장을 키우기 위해 로맨스 현상 작품 공모전을 개최했고, 드디어 1회 가작 수상작인 <노처녀 길들이기>가 최초 한국 로맨스란 타이틀을 달고 출간됩니다.

당시는 PC통신을 통한 창작이 활발했던 시절인 만큼, 이 작품을 최초의 한국 로맨스로 보기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내 순수 창작 로맨스를 출판 시장에 내놓았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국내의 작가와 국내의 독자들로 굴러갈 수 있는 시장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이후 인터넷 공간에서 연재되는 ‘인터넷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귀여니’라는 작가의 작품들이 대표적인 인터넷 소설입니다. 인터넷 특유의 생략된 용어, 초성체 등을 거침없이 구사하여 많은 비판도 함께 받았던 작품들이었습니다만, 이 시대상의 철저한 반영이야말로 당시의 독자들이 로맨스에 기대하는 ‘기대의 지평’에 부합하게 만들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증거로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은 물론, 다양한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로맨스 기반의 인터넷 소설 시장은 10대부터 50대를 아우르며 점차 그 위세를 키워나갔습니다.

이후 창작 공간이 인터넷 플랫폼 형태로 변화되면서 로맨스 웹소설의 시장이 열리고, 한국 로맨스 작가 협회가 탄생하는 등, 로맨스는 대내외적으로 거대한 변화와 집단화를 이룩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소규모 작가 카페 단위의 창작공간이 활발하게 전개되며 여성 창작자들의 문법과 작품이 쌓여갔지요.
3. 로맨스의 기능과 현상
로맨스는 이처럼 오랜 역사와 시간을 다양한 연령층과 소통하며 형성된 탓에 웹소설, 전자책, 종이책 시장이 다양하게 발전했습니다. 각각의 매체나 디바이스에 따라 각자의 계보가 활발히 공유되었고, 로맨스라는 장르는 더욱 더 전문화, 보편화되었습니다. 이를 읽고 학습하는 젊은 작가들도 쉽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장르가 되었지요.
물론 로맨스에 한계가 존재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특히 근대적 로맨스는 낭만적 사랑의 추구의 최종 종착지가 ‘가정’이라는 점이 비판됩니다. 가족의 해체, 가부장 제도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비혼주의 선언이 곳곳에서 목격되는 이 시대에는 뒤떨어지는 장르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근대의 로맨스의 종착지가 ‘결혼과 가정’이라는 점은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당시의 미혼 여성에겐 직접 상속이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부친을 벗어난 여성이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공간을 자력으로 획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즉 여성이 스스로 선택해서 능동적으로 일하고 쉬고 생활할 수 있는 가정이란 것은, 여성만의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결혼은 가문끼리의 정치적 고려에 의해서 행해졌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여성 개인의 감정을 긍정하는 ‘낭만적 사랑’을 통한 결혼, 그렇게 여성이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획득해내는 ‘가정’이란 건 여성에게는 스스로 얻어낸 보상이 됩니다. 그래서 19세기엔 낭만적 사랑을 통해 결혼에 성공하고, 가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히려 여성의 능동적인 서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로맨스라고 볼 수 있죠.


여성 주체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최대한 긍정하려는 이야기가 로맨스의 의의라고 본다면, 그 의의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현대의 로맨스에서는 여성이 자력으로 획득해내는 보상의 지평이 더 확장될 필요는 있습니다. 즉 ‘결혼과 가정’이란 것은 여성이 자력으로 획득하는, 여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보상물이었지만, 이젠 다른 상징이 필요할 때가 됐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매 순간 노력하는 장르가 ‘로맨스’이기도 합니다. 로맨스는 장르인 동시에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로맨스의 독자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고 조금도 타협되지 않기를 바라며 끝까지 추구해냅니다. 그것이 로맨스 장르만이 갖는 급진성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장르와 달리 로맨스는 주로 여자에 의해서 창작, 소비되는 주도적 공간이며,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용들은 여성 자신의 신체, 의지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로맨스는 여성 당사자들의 생각을 펼쳐내기 위한 창구가 되었고, 그 속에서도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4. 웹소설에서의 로맨스 판타지
그럼 웹소설에서의 로맨스 장르는 어떻게 펼쳐지고 있을까요? 웹소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장르인 로맨스 판타지를 놓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흔히들 로판이라고 부르는 카테고리입니다.
로맨스 판타지에서의 무대는 완벽한 허구의 세계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설정은 책속의 등장인물에 빙의되는 빙의물, 한 번 죽었지만 다시 인생의 주요 분기점 전으로 돌아가는 회귀물, 현생에서 죽음을 맞지만 그 기억을 가지고 이세계의 다른 인물로 태어나는 환생물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특정한 시대로 타임슬립을 한다거나, 대체역사 속 한 장면으로 건너간다거나 하는 것이 있죠. 또한 피폐물이라고 하여, 주인공을 고통에 빠뜨리는 특정한 장르도 있습니다만, 이는 로맨스 장르의 직속 계보로 보기엔 여러모로 난해한 지점이 있으니 예외로 두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로맨스 판타지의 주요 사건들은, 판타지 차시에서 말했었던, ‘이세계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라는 점입니다. 전근대적인 낯선 곳에서 여주인공은 현대인으로서의 지식, 또는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신변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풀어나갑니다. 이러한 종류의 로맨스 판타지에서의 여주인공은 오래 걱정하고 불안해하지도 않으며, 정체성의 상실을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시원하게 능력을 전개해나가고,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판타지에서의 이세계는 주인공을 심각한 시련에 빠뜨리는 저승과 같은 공간이라면, 웹소설에서의 이세계는 이러한 여주인공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협의되어 연출된 무대와 비슷해집니다.
여주인공은 웹소설 독자들의 기대의 지평에 따라, 단 한 사람을 위해 창조된 듯한 거대한 세계를 통째로 휘젓습니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 전체를 주인공이 주도적으로 가지고 놀고, 결과적으로 능동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어지죠.
이렇게 생각하면 상속에서 배제된, 소외된 여성이 자신이 있을 공간을 자력적으로 획득한다는 근대의 로맨스 서사와 맞닿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로맨스라는 것이 항상 틀에 박힌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야기로 오해되곤 합니다만, 웹소설의 로맨스 판타지가 그려내는 그림은 이미 그와는 한참 달라졌습니다. 또한, 웹소설의 로맨스 판타지라는 것이 벌써 틀에 박힌 환생물, 회귀물, 빙의물이 반복되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로맨스는 도태되기 보다는 또다시 변화될 것입니다. 언제나 로맨스 장르는 한 발 앞선 여성의 삶에 대해 먼저 진단하고 이야기하는 장르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