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494] 좀비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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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설명할 때, 좀비는 가장 훌륭한 예시다. <부산행>과 <서울행> <킹덤>과 <창궐>을 비롯해 웹툰 <언데드> <좀비딸>에 수많은 좀비 게임과 소설, 그리고 놀이공원에서 진행하는 좀비 특집까지. ‘좀비’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시작된 수사였으나, 이제는 우리도 별다른 설명 없이 좀비라는 코드의 문화적 맥락을 공유할 수 있다.

장르는 한 시대에 하나의 의미로 확정되지 않는다. 현대 대중은 비윤리적인 좀비의 이미지를 빠르게 전유하였다. 대중에 의해서 좀비의 의미가 회복되고 전유되는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좀비라는 기호의 시작은 분명 비도덕적이었다. 좀비는 기계에 대한 상상력, 특히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기계의 상상력이 부족한 시기에 만들어진 ‘로봇’이자 ‘노예’다. 삶이 구속되고 어떠한 희망과 삶을 보장 받지 못하는, 오로지 살아있는 시체로서 죽지 못하는 (Un-Dead) 존재. 그것이 좀비였다.

좀비는 공포 콘텐츠에서도 독특한 층위로서 제시되었다. 대부분의 공포영화들이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공포스러운 상황을 이입하기 위한 기능적 존재로 다루었다면, 좀비 콘텐츠에서 주인공은 이미지너리에너미Imginary-Enemy인 좀비와 맞서 싸우기 위한 대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좀비물에서는 건강한 신체의 백인 중산층 남성이 메인으로 등장하며, 약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서바이벌적 사회 구조가 세계관에 녹아 있다.

무찔러야 할 절대적 악이었던 좀비는 영화 <웜바디스>처럼 어느덧 연애가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좀비와 ‘나’의 관계는 점차 가까워졌고, 우리는 이내 우리 모두가 좀비라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노예로서의 좀비 정체성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대 정치경제에서의 우리의 모습과 다름없으니까.

이러한 용어의 변화는 단순히 콘텐츠의 영역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좀비로 가장 많이 은유되는 대상은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었다. 보수 진영의 사람들은 소통 불가능성을 바탕으로 진보 진영을 ‘좌좀’이라고 불렀다. 이렇듯 장르적 코드는 일상의 삶과 무척이나 친숙한 것이며, 이러한 장르적 인식을 바꾸는 것은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 몇 가지를 회복시 키는 일이나 다름없다.

이번 호에서 좀비를 주제로 삼은 것은 단순한 여름 특집용 기획이 아니다. 장르에 대한 이해를 점검하는 동시에 장르가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며, 동시에 집단적 대중, 특히 웹 2.0 시대의 뉴미디어를 통해 발언하는 셀러브리티의 의견에 집단 동조하며 의사를 잃어버린 신체적 존재로서의 좀비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종합적으로 고민하기 위한 특집이다.

특집에 맞게 좀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줄 필진들을 모셨다. 좀비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소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좀비와 한국의 사회, 역사를 다양한 미디어로 관통하며 통시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분들이다. 이번 기획 역시도 한국 장르에 대한 소중한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리라.